이지용은 대한제국기 학부대신, 내부대신, 중추원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0년(고종 7)에 태어나 1928년에 사망했다. 흥인군 이최응의 손자이며 고종의 종질이다. 1887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903년 주차 일본국 특명전권공사로 일본과 밀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강제 병합 직후에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 작위를 받았다. 불교옹호회의 고문, 조선귀족회의 이사, 동민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870년 윤10월 23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은용(垠鎔), 자는 경천(景川), 호는 향운(響雲)이다. 고종의 종질(從姪)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형인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완영군(完永君) 이재긍(李載兢)이다.
조선 말기에 이조참의, 안주목사 등을 지냈다. 대한제국기에는 황해도관찰사,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서리, 내부대신 등을 역임하였으며, ‘을사오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 조선귀족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6월 30일 사망했다.
1887년(고종 24) 12월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待敎)가 되었고, 1888년 6월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 1889년 10월 시강원 겸문학(兼文學), 1890년 2월 이조정랑, 3월 시강원 겸필선(兼弼善), 7월 형조참의를 거쳤다. 1892년 11월 돈녕도정(敦寧都正), 1893년 1월 이조참의, 3월 내의 부제조(內醫副提調), 10월 안주목사, 12월 안악군수를 지냈다. 1895년 4월 왕태자비 궁대부(王太子妃宮大夫)에 임명되었고, 7월 신사유람단 일행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10월 종척집사(宗戚執事)가 되었다.
아관파천 후인 1896년 8월 비서원승, 10월 왕태자궁 부첨사(王太子宮副詹事), 1897년 4월 시강원 첨사(詹事), 5월 궁내부 특진관, 1898년 5월 중추원 1등 의관에 임명되었고, 6월 황해도관찰사 겸 황해도재판소 판사와 1899년 8월 경상남도관찰사 겸 경상남도재판소 판사를 역임했다. 1900년 9월 궁내부협판과 10월 규장각 직학사(直學士)를 겸임했다. 1901년 1월 궁내부대신 서리로 일본국 특명전권대사를 겸임했고, 5월 군부대신 임시서리를 맡으면서 육군참장과 태의원경을 겸임했다. 6월 다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진연청 당상(進宴廳堂上)과 상의사 제조(尙衣司提調)를 겸임하다가 7월 군부대신 임시서리를 맡았다. 9월 원수부 기록국 총장 임시서리와 헌병사령관을 겸했고, 10월에는 혜민원 의정관도 겸했다. 1902년 1월에는 경부대신 임시서리로 전임하면서 2월 혜민원 총재, 4월 전선사제조(典膳司提調) 겸 수륜원 총재(水輪院摠裁) 겸 기로소 비서장(耆老所祕書長)에 종사했다. 같은 해 7월 법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8월 교방사 제조(敎坊司提調)를 겸했다. 1903년 10월 다시 주차 일본국 특명전권공사로 특명을 받았다.
1903년 10월부터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추진하는 한일밀약에 동조해서 일본과 밀약을 맺는데 앞장섰으며, 12월 외부대신 임시서리로 전임되었다. 1904년 1월 종척집사 겸 의정부 찬정 겸 헌병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하야시 곤스케와 을미사변 당시의 일본망명자 처리를 교섭하면서 운동비 1만원을 받았다. 같은 해 2월 법부대신 겸 헌병사령관 임시서리 겸 평리원 재판장에 지명되었다. 2월 23일에는 외부대신서리로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에 조인하였다. 한일의정서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일본 정부가 한일친선대사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는 것에 대응하여 3월 한국정부가 파견하는 일본보빙대사로 특파되었다. 그 공로로 4월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여러 관직을 두루 겸직하여 5월 규장각 학사, 6월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7월 법관양성소장 · 헌병사령관, 8월 장례원경 · 표훈원 의정서 · 군제의정관, 9월 교육부총감을 거쳤다. 1905년 2월 한 달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면서 3월 법부대신이면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로 있다가 5월 내부대신으로 전임했고, 4월 일본 정토종 한인교회 총재로 위촉되었다. 7월 찬모관(贊謀官)을 겸하다가 9월 학부대신으로 잠시 지냈고, 다시 내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겨 1907년 5월까지 재임했다.
1905년 11월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06년 8월 대한식산장려회 총재, 10월부터 11월까지 적십자사 총재 임시서리로 위촉되었고, 12월 일본국 특사로 가서 일본 정부가 주는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1907년 1월 통감부 정책에 동조하는 친일협력단체인 보부상조직인 동아개진교육회 찬성장으로 참여했다. 1907년 3월 대한의원 원장을 겸임하다가 5월 내부대신을 사임했는데, 사임 직후 중추원고문으로 임명되었다. 6월 일본국 박람회 시찰단으로 일본에 갔다.
1908년 2월 사립 돈명의숙(敦明義塾) 찬성장과 4월 사립 보광학교 교장, 5월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8월 대한실업협회 총재,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 12월 기호흥학회 특별찬성회원 및 용산방회(龍山坊會) 회장으로 활동했다. 1909년 6월 단군 · 조선 태조 · 일본 천황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臣]의 위패봉안과 의식을 거행하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총부의장으로 신궁건축문에 발문을 지었다. 7월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황태자 도한(渡韓) 기념장을 받았다. 12월 대동교회 부장으로 일본적십자사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기념추도회에 참석했다.
1910년 1월 일진회의 「합병성명서」에 찬성해 조직한 국민동지찬성회 고문, 공자교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일본인과 수산합자회사를 설립했다. 2월 북간도 철로부설에 착수했고, 3월 이근호(李根澔) · 민건식(閔健植)과 합자해 대해어업회사를 만들었으며, 6월에는 함경북도 회령-성진 간 철도부설을 발기해서 경비의 1/3을 부담했다.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가 백작 작위를 주었으며, 같은 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같은 달 조선귀족관광단 일원으로 처와 함께 일본 각지를 시찰했으며, 11월에는 일본 천황이 주병(酒甁)을 주었고, 1911년 1월에는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다. 1912년 1월 도박죄로 검거되어 2월 태형(笞刑) 100대를 선고받아 3월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되고 4월 귀족 예우마저 정지되었다. 1915년 5월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시정 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기부했고, 9월 특사로 감형되면서 백작 작위를 회복했다.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식에 처 홍씨와 귀족대표로 참석해서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2월 친일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빈전주감 제거(殯殿主監提擧)를 맡았다. 1922년 10월 종3위로 승서되고 12월 상무사 사장으로 선출되어 1925년 10월까지 재임했다. 1924년 8월 무당단체인 신리종교(神理宗敎)의 대교장(大敎長)으로 추대되었다. 1925년 4월 조선귀족회 이사로 연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7월 다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28년 6월 사망할 때까지 매년 3,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빈전주감 제거와 고문에 임명되었다. 1927년 9월부터 12월까지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고문으로 활동했다. 사후 특지로 정3위에 추서되었다.
이지용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 · 7 · 9 · 13 · 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4: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20∼34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