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덕민(德民). 현학주(玄學周)의 아들이며, 처는 최덕연(崔悳淵)의 딸이다. 22세 때인 1858년(철종 9) 식년역과(式年譯科)에서 왜학(倭學) 전공으로 합격하여 역관의 길로 들어섰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이루어지면서 대일정책의 변화가 일어나자, 그 동안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수행해왔던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은 이듬해 8월에 유배당하고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의 대일정책의 변화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이 1875년 4월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파견하여 무력시위를 벌일 당시 일본측과의 교섭을 맡았으며, 1876년 1월 일본과의 수교를 위한 강화도회담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대원군으로부터 강화에 반대하는 서한을 받아 접견대관 신헌(申櫶)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뒤인 1876년 4월 4일에는 수신사 김기수(金綺秀)를 수행하여 당상역관이 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 해 10월에 부산훈도가 판찰관(辦察官)으로 개칭되자 판찰관직을 맡았으며, 1878년 부산해관이 설치된 이후 관세권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교회(敎誨)·직장(直長)의 직을 거쳐 1898년 7월에는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되었다.
1903년 2월에 농상공부협판·탁지부협판을 거쳐 10월에는 수륜원부총재(水輪院副摠裁)가 되었다. 1906년 6월 봉상사제조를 역임하였고 이듬 해에 훈2등을 수여받았다. 품계는 종1품 숭록대부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