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갑부인 현준호(玄俊鎬)와 목포의 거상 김상섭(金商燮)이 주동이 되어 광주와 목포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의 지주자본과 상업자본의 규합으로 창립, 발족된 순수한 민족계 은행이다. 설립 동기는 1908년 8월에 창립된 광주농공은행이 1918년에 조선식산은행에 흡수, 합병되는 것을 계기로 이에 대응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농공은행은 을사조약 후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目賀田種太郎〕의 발의로 설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은행에서는 그 지방의 다수의 민족자본가가 참가하였고 민족계 실업인을 위한 금융도 담당하였다. 그런데 총독부의 정책금융기관인 식산은행에 병합됨으로써 지방의 민족계 실업인에 대한 금융의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 광주농공은행에 참여하였던 지방 유지들은 한국 실업인의 금융을 전담하는 민족계 은행의 설립을 절실히 요망하게 되었고, 이에 1920년 8월 은행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운영에 있어서 끝까지 일본인 자본의 가담을 배제하고 순수 민족자본만으로 운영되었다.
처음에는 광주에 본점, 목포에 지점을 두고 발족하였으나, 그 후 순천 · 장성 · 보성 등지에도 지점을 설치하였다. 1933년 7월 동래은행(東萊銀行)을 흡수, 합병하게 됨으로써 영업지역이 경상남도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동래 · 거창 · 영광 · 담양 등지까지 지점을 설치하게 되었고 자본금이 200만원으로 증자되어 대은행으로 발전하였다.
일제는 1928년에 신은행령을 발포하였다. 민족계 금융기관에 대한 일본인 자본의 지배체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식민지금융정책을 강화해 나가면서, 민족계 은행의 통합을 강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식민지 지배당국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독자운영을 고수하자, 총독부는 일본인 자본의 참가를 거역하고 일본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일은행(東一銀行)과의 통합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결국 1942년 4월 30일에 합병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