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중선(仲善). 홍수제(洪受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행대사간(行大司諫) 홍우전(洪禹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이며, 어머니는 김취로(金取魯)의 딸이다. 홍계록(洪啓祿)에게 입양되었다.
1750년(영조 26)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1759년(영조 3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된 다음 정언·지평·수찬 등을 거쳐, 1761년 사간이 되었다.
1763년 북도감진어사(北道監賑御史)로 다녀와 병사 이방좌(李邦佐)의 탐학상을 보고하고 엄벌할 것을 건의해 양양(襄陽)에 10년 간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부응교·응교 등을 거쳐, 1764년 교리가 되었다.
그 뒤 승지를 거쳐 장연현안핵어사(長淵縣按覈御史)가 되어 민전(民田)을 강탈하고 이에 항의하는 민간인을 살해한 현감 이경춘(李景春)의 죄상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그 뒤 집의·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1774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이어 대사성을 지내고, 이듬 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외지로부터 미곡(米穀)을 사들여오면서 1만 4,000냥(兩)을 몰래 빼돌린 사실이 해서찰민은어사(海西察民隱御史) 임희우(任希雨)에게 적발되어 파직되었다.
이어서 1776년(정조 즉위년)에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장전(臟錢) 4만냥, 조(租) 2,500석, 송목(松木) 260주(株)를 사취한 사실이 드러나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둠.)되었다.
이듬 해 아들 홍상범(洪相範)이 아버지의 치죄에 불만을 품고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 벽파(僻派)와 제휴,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恩全君禶)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였다. 그러나 중간에 발각되어 아우 홍필해(洪弼海)·홍지해(洪趾海)·홍찬해(洪纘海) 및 조카 홍상간(洪相簡) 등과 함께 주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