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
1915년 1월 15일 달성군 수성면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라는 명목으로 모임을 가지고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 등과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回復團中央總部)라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기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1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하던 1916년 대구에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조국광복의 기수가 될 것을 역설하고, 광복회·의용민족대동단 등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각 민족단체의 지도자들과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면서 김태련(金兌鍊)·이만집(李萬集) 등과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 3월 3일 일제에 예비검속되어 다시 2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구에서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교직을 박탈당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