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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화랑가
인사동 화랑가
회화
개념
회화 · 조각 · 판화 등의 미술품을 전시 · 판매하는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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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회화 · 조각 · 판화 등의 미술품을 전시 · 판매하는 가게.
내용

화상(畫商)의 입장과 소규모 기획 전시와 특정 작가 초대전 또는 전시장 대여를 겸하기도 한다.

영어의 갤러리(gallery), 프랑스어의 갈르리(galerie)라고 한다. 수집품의 상시 진열, 기획 전시, 특별 전시, 조사 및 연구 활동 기능을 가지는 사회적 공공 시설의 미술관, 즉 영어의 뮤지엄(museum), 프랑스어의 뮈제(muse'e)와 구별되는 성격이다. 하지만 구미의 미술관 중에는 뮤지엄이 아닌 갤러리로 호칭되는 예도 있다(런던과 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 등).

서양에서의 갤러리의 시초는 르네상스 이후의 바로크 궁정 건축에서 주로 미술품 진열을 위하여 설정한 기다란 회랑(回廊)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것이 19세기 이후에는 화상이 영업적으로 운영하는 미술 작품 진열 및 판매장으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서의 근대적 화랑의 시초로는 1900년 서울에 생겼던 상인 정두환(鄭斗煥)의 서화포(書畵鋪)와 1908년에 최영년(崔永年)이 당시 명성이 높던 화가 조석진(趙錫晋)과 같이 설립하였던 한성서화관(漢城書畵館) 등을 들 수 있다.

그 뒤 1913년에는 서화가 김규진(金圭鎭)이 근대적 시민 사회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자신을 포함한 유명 서화가의 글씨·그림 판매소로서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개설하고 영업을 시도하였다. 그 점포는 김규진이 진작부터 운영하던 서울 소공동의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 건물에 병설한 것이었다.

1914년에는 조카 김영선(金永善)에게 경영을 맡겼던 평양의 기성사진관(箕城寫眞館)에 서화관 분점을 내는 활기를 보였다. 그러나 그 서화관 운영은 뜻대로 되지 못한 채 1920년 무렵까지 겨우 유지되다가 중단되었다.

그 실패와는 달리 서울에서 10여 년간 성공한 화랑 경영자는 오봉빈(吳鳳彬)이었다. 1927년에 동경의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 청년이던 그가 1929년 서울에 개설한 조선미술관(朝鮮美術館)은 공공 성격의 미술관이 아니라 상업 화랑이었다.

오봉빈은 3·1 운동 민족 대표의 한 사람이며 서화계의 중심적 원로이던 오세창(吳世昌)의 적극적 협력을 받았다. 근대적인 화랑 경영을 의도한 조선미술관은 광화문 네거리 서북쪽에 위치했었다. 1929년 10월에 동아일보사 후원을 받은 조선미술관의 첫 기획전은 조선서화진장품전람회(朝鮮書畵珍藏品展覽會)였다.

오세창을 비롯하여 박재표(朴在杓)·박영철(朴榮喆)·이한복(李漢福)·이도영(李道榮)·최남선(崔南善) 등이 소장품을 출품하고, 오봉빈의 개인 수집품과 조선미술관에 위탁된 것들이 진열되어 교환 및 판매가 이루어졌다.

1931년에는 조선미술관 주관의 대규모 조선명화전(朝鮮名畵展)이 일본 동경의 우에노미술관[上野美術館]에서 개최되어 큰 성과를 보았다. 그 뒤 조선미술관 기획전은 서울에서 여러 형태로 거듭되었다. 김용진(金容鎭)·손재형(孫在馨) 등의 소장품도 전시되었다.

1940년에 조선미술관이 기획한 1차 10명가산수풍경화전(十名家山水風景畵展)은 상업 화랑으로서의 획기적인 착상이었다. 초대된 화가는 고희동(高羲東)·허백련(許百鍊)·김은호(金殷鎬)·박승무(朴勝武)·이한복·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최우석(崔禹錫)·이용우(李用雨)·변관식(卞寬植)이었다.

전통적 민족 화단의 진작에 크게 자극을 준 그 기획전은 애초에 연례전으로 구상되어 있었으나 급변한 사정으로 1941년에 조선미술관이 문을 닫게 되면서 중단되었다.

조선미술관 외에 1930년대 초부터 서울에 나타난 현대적 화랑은 화신백화점과 일본인 경영의 미코시(三越) 및 초지야(丁字屋) 백화점에 마련된 전시장이었다. ‘화랑’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사회적으로 정착한 것은 그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백화점 화랑은 개인전·그룹전·단체전이 필요로 하는 전시장 시설의 대여 기능에 불과하였다. 그러한 백화점 화랑의 성격은 오늘날에도 대체로 변함이 없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미코시 건물은 동화백화점·신세계백화점으로 개칭되고, 초지야는 미도파백화점으로 바뀌어 계속 화랑 시설을 운영하였으나 대여 위주였다.

반면, 1947년에는 서울 충무로에 판매 영업과 전시장 대여를 겸한 개인 경영의 대원화랑(大元畵廊)이 등장하여 6·25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매우 활발히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웃 명동에서 역시 1947년에 유화·조각·공예 작품을 진열하며 문을 열었던 또 하나의 상업 화랑인 대양화랑(大洋畵廊)은 이내 난관에 부닥쳐 얼마 가지 못하였다.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7월에 서울 종로 4가의 천일백화점이 개설한 미술상설진열관은 백화점 직영의 상업 화랑이었다. 당시 그 백화점의 지배인이던 산업 미술가 이완석(李莞錫)이 미술계와 사회를 위해 꾸민 것이다. 운영 방침은 고미술·현대 미술 작품의 상시 진열, 작품 즉매(卽賣)·대화(貸畵)·감정, 전시장 대여 등이었다.

개관 기념으로 한국화·양화·조각에 걸쳐 40명의 작가가 초대된 현대미술작가전을 가졌고, 뒤이어 전쟁 중에 죽은 김중현(金重鉉)·구본웅(具本雄)·이인성(李仁星)의 3인 유작전을 열어 천일화랑(天一畵廊)의 존재를 부각시켰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 안에 외국인 부인들이 만든 작은 화랑이 등장한 것은 1956년이었다. 미술에 관심이 있던 한국 주재 외국인 부인들이 서울 아트 소사이어티 (Seoul Art Society)를 조직하고 반도호텔측과 교섭하여 1층 중앙 로비 한 켠에 작은 공간을 얻었던 것이다.

화상에 뜻이 있던 미국인 여성 실리아(Celia, Z.)가 중심이 되었던 이 반도화랑은 외국인 여행자와 상주자에게 인기가 있는 화가들의 한국화·유화 소품을 주로 진열하여 비영리 판매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역시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1958년부터 1960년 5월까지 아세아재단이 지원하여 겨우 유지되었다.

1959년 8월부터는 양화가 이대원(李大源)이 운영권을 위임받아 발전적 활로를 모색하다가 아세아재단의 지원이 중단된 뒤에는 독자적 경영에 힘쓰며 판매 실적을 상당한 궤도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간의 운영 직원이던 한용구(韓鎔求)와 박명자(朴明子)가 독립하려고 1970년에 반도화랑을 떠나게 되자 이대원의 화랑 경영권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반도호텔 자체가 헐리고 롯데호텔이 신축되고는 마지막 운영권자였던 박호열(朴浩烈)이 한때 반도화랑 간판을 다시 살리려 하였으나 어려운 사정이 겹치다가 결국 실패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산업과 경제의 발전 추세에서 미술 애호 및 관심 계층이 확산되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화랑 영업을 뜻한 시도자들이 서울에 속출하고 지방 도시에도 등장하였다.

그와 함께 구매층 사이에서는 유명 화가의 그림 구입 또는 수집의 경합 현상이 조성되며, 그림 값을 치솟게 하였다. 1970년대에 개관하여 기틀을 잡고 1999년 말 현재 존속되고 있는 유력 화랑은 다음과 같다(열거 순서는 개관의 선후).

서울: 갤러리현대(현대화랑의 개칭), 조선화랑·진화랑·그로리치화랑·동산방화랑·노화랑·선화랑·가람화랑·미화랑·예화랑·원화랑·동숭갤러리·유나화랑·샘터화랑.

지방 도시: 동서화랑(마산)·대림화랑(대구)·오원화랑(대전)·공간화랑(부산)·맥향화랑(대구)·이목화랑(대구, 뒤에 서울로 이전하여 데미화랑으로 개칭)·진화랑(부산).

한편 1970년대에 개관, 활발히 운영되다가 여러 사정으로 좌초한 화랑으로는 명동화랑·한화랑·서울화랑·경미화랑·양지화랑·문화화랑·문헌화랑·두손갤러리 등이 있었다. 1980년대에는 그간의 붐에 자극된 새로운 많은 화랑의 출현이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 경제력의 전반적 침체와 불안정에 직접적 영향을 받아 화랑계도 불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화랑들이 그간의 토대로 평상적 운영을 유지하였다.

1976년에 이미 결성된 사단법인 한국화랑협회는 회원 화랑들의 상호 협력과 화랑계의 발전을 도모하여, 협회 기관지 『미술춘추』·『화랑춘추』·『화랑회보』·『아트 갤러리』·『갤러리 투데이』 등을 계간으로 간행하였다.

1999년 말 현재 화랑협회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총 102개 화랑이며, 그 과반수인 76개 화랑이 서울에 집중돼 있다. 1980∼90년대에 개관한 협회 가입의 유력 화랑은 다음과 같다.

서울: 대림화랑·백송화랑·세종화랑·국제화랑·표화랑·가나화랑·박여숙화랑·현화랑·나비스화랑·정송갤러리·인화랑·청작화랑·갤러리상문당·학고재·인데코화랑·한선갤러리·갤러리2000·조형갤러리·묵화랑·갤러리포커스·다도화랑·예맥화랑·종로갤러리·박영덕화랑·인사갤러리.

지방도시: 송아당화랑(대구)·금화랑(부산)·인공갤러리(대구)·민갤러리(대구)·한성갤러리(대구)·아라리오화랑(천안)·쌍인화랑(광주)·중앙화랑(대구)·조현화랑(부산)·봉성갤러리(대구)·송하갤러리(부산)·갤러리소헌(대구)·갤러리아그배(광주)·예진화랑(진주)·예림화랑(진주)·무심화랑(청주)·갤러리모던(창원)·신미화랑(대구).

앞의 화랑들과 같은 시기에 개관, 운영되다가 사정으로 폐관 또는 협회를 탈퇴한 화랑으로는 백제화랑·한국갤러리·샐러리서미·63갤러리·수목화랑·로이드신갤러리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화랑협회 회원화랑내역』(사무국, 1999)
「한국의 근대화랑사」(이구열, 『미술춘추』 1∼11호, 한국화랑협회, 1979∼1982)
「1970년대와 서울의 화랑」(이구열, 『화랑』 제27호, 현대화랑,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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