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암집 ()

희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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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문헌
조선 후기의 학자, 방두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60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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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방두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60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860년(철종 11) 방두천의 족손 방석필(房錫弼)과 족종손 방준기(房濬箕)가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기정진(奇正鎭)의 서문, 권말에 방석필의 징서(徵序)와 방준기의 발문이 있다.

서지적 사항

2권 1책. 목활자본. 장서각 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앞부분에 저자의 행장이 있고, 권1에 시 86수, 가(歌) 1편, 만(輓) 9수, 권2에 소(疏) 1편, 서(書) 17편, 해파인의(解破人疑)·설(說)·만필(漫筆) 각 1편, 무제(無題) 2편, 변(辨) 3편, 서(序) 4편, 발(跋) 1편, 증별문(贈別文) 1편, 행장 2편, 제문 9편, 축문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疏)는 100여 년이 되도록 사액을 받지 못한 채 박광전(朴光前)을 제향하고 있는 죽천서원(竹川書院)에 현판 액자를 청한 내용이다. 송시열(宋時烈)에게 올린 서(書)에서는 1687년 표류하던 상선(商船) 한 척이 영광 경내에 정박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상선에 실린 물건은 대개 불경(佛經)으로, 그 중 선해(禪解)한 『주역』 3책이 있었다. 그것은 만력(萬曆) 연간에 승려 지욱(智旭)이 찬술한 것이었다.

괘획(卦劃)과 효사(爻辭)는 유가(儒家)의 편차에 변형이 없지만 정전(程傳)과 본의(本義)가 삭제된 것을 보고, 불가의 문자가 성행하게 되어 석씨(釋氏)의 근리난진(近理亂眞)한 점을 깊이 우려하였다. 이에 유학에 후세의 무궁한 재앙을 열어주는 혐의를 지적하고, 후세를 위해 입론(立論)하여 대책을 세워야 함을 강구하였다.

박사원(朴士元)에게 보낸 편지는 태극에 관한 설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태극은 이(理)고 이도 이지만, 도(道)도 역시 이므로 도의 전체로 말하면 태극이 되고, 태극의 유행을 말하면 도가 된다. 그 이의 유행을 지적하여 말하면 진실로 대소의 분별이 있거니와, 그 이의 전체를 지적하여 말하면 어찌 대소의 분별이 있을 수 있느냐?”

이밖에도 서(書)에는 대개 태극에 대한 논설이 많으며, 예설(禮說)에 대해 질의한 내용도 보인다. 변에서는 성(誠)을 한 다음 경(敬)을 해야 한다는 변론과, 오행(五行)이 상생상극하는 원리에 관한 변론이 들어 있다. 당시 유학의 학풍을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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