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분청사기 상감사각묘지의 제목은 ‘유명조선국통정대부공조참의겸성균관사성금유처 숙인정씨묘(有明朝鮮國通政大夫工曹參議兼成均館司成琴柔妻淑人鄭氏墓)’이다. 묘지명의 내용에 따르면 정씨의 본은 해주(海州)이고, 아버지는 낭장(郎將) 정박희(鄭朴希)이며, 어머니는 수안김씨(遂安金氏)이다. 경신년(庚申年)인 1380년에 태어나서 13세에 금유(琴柔 1372-1444년)에게 시집갔다. 정씨는 정묘년(丁卯年)인 정통(正統) 12년(1447) 11월 29일에 죽어서 무진년(戊辰, 1448년) 3월에 경상도 상주 산양현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남편인 금유(琴柔 1379-1444년)가 세종(世宗)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음이 『세종실록』95권 24년(1442) 1월 28일 기사에 기록되었다. 금유는 기미년(己未年)인 1379년 1월 8일에 태어나서 갑자년(甲子年)인 정통 9년(1444년) 6월 4일에 사망하였다.
분청사기 상감사각묘지는 몸통이 세로방향으로 길쭉한 사각의 통형이다. 몸통의 중간부분이 넓고 위와 아래쪽이 약간 좁아 물레로 기본 형태를 만든 다음 두드려서 모서리의 각(角)을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몸통의 윗면과 바닥면의 중앙에는 각각 크기가 다른 구멍이 뚫려 있으며, 바닥면을 제외한 몸통의 다섯 면에 백토를 감입하여 상감기법으로 지문(誌文)을 표기하였다. 지문은 세로 방향인 종서(縱書)이며 옆면에 4∼5줄, 윗면에는 두 줄이 표기되었다. 바닥에 모래가 섞인 내화토(耐火土) 빚음을 네 곳에 받쳐서 번조(燔造)하였다.
분청사기 인화문 사각편병은 몸통이 가로방향으로 긴 장방형(長方形)으로 각 면(面)의 모서리를 비스듬히 깎았다. 윗면의 중앙에는 몸통과 따로 제작하여 부착한 지름(口徑) 10.1cm의 커다란 구연이 있다. 몸통의 옆면 네 곳에는 작은 점(點)이 연달아 빼곡히 채워진 형태의 승렴문(繩簾文)을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장식하였고, 긴 면에는 상감기법(象嵌技法)의 뇌문대(雷文帶)를 둘렀으며, 비스듬히 깍은 모서리와 구연부의 테두리에는 작은 인화문(印花文)으로 장식하였다. 윗면의 구연부 양쪽에는 상감기법으로 활짝 핀 꽃을 표현하였다. 바닥에 모래가 섞인 내화토(耐火土) 빚음을 여섯 곳에 받쳐서 번조(燔造)하였다.
분청사기 상감사각묘지와 분청사기 인화문 사각편병은 재료인 태토와 유약, 형태인 사각의 방형, 제작방식, 번조방식 등이 동일하며 완형이다. 따라서 묘지와 편병의 제작시기가 동일할 것으로 판단된다.
분청사기 상감사각묘지는 제작시기와 관련하여 절대연대(絶代年代)인 피장자 숙부인 정씨의 사망시점인 1447년과 매장 시점인 1448년이 명확하게 표기된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묘지의 재료 및 형태, 지문의 표기방식, 제작시기가 비슷한 정통십삼년명분청사기상감묘지(보물, 2005년 지정)와 비교할 수 있어 그 자료적 가치가 크다. 두 묘지는 제작시기가 각각 정통 12년(1447)과 정통 13년(1448)으로 15세기 중엽 경 자기제 묘지의 제작 양상을 보여준다.
분청사기 인화문 사각편병은 몸통이 장방형인 ‘장군형 편병’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원통형 몸통의 15세기 분청사기 장군과 달라 주목된다. 특히 지름이 10.1cm에 이르는 구연부의 크기는 일반적인 장군의 두 배이므로 그 조형적인 독창성이 돋보인다. 이와 함께 몸통 전면에 장식된 인화문의 양상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분청사기상감사각묘지(1447∼1448년)의 연대에 의거할 때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한국도자사 연구에 있어서 인화기법 분청사기의 절정기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