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첫 번째 도읍인 졸본지역은 본래 소노부(消奴部)의 근거지였다. 이후 부여지역에서 내려온 주몽집단 계루부(桂婁部)가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왕권이 미약했던 고구려는 인근 집단과 연맹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상황이었다. 한편 졸본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후한(後漢)의 제2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국의 군현(郡縣)과 마주한 상황은 고구려에게 늘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계루부왕권을 강화하고 후한 왕조의 군사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고구려가 선택한 새로운 도읍지는 압록강변의 집안지역이었다.
국내지역으로의 천도 관련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나타난다. 제사용 돼지의 국내 도망설화를 통해 필요성이 제기된 그 이듬해인 서기 3년(유리왕 22)에 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하였다. 그런데 이 기록을 해석하는 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삼국사기』기록을 중시하여 천도시기를 유리왕대로 이해하는 견해가 정설이지만 『삼국사기』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하여 태조왕대 또는 산상왕대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또한 천도한 국내 위나암의 위치를 졸본에서 국내지역으로의 천도가 아니라 졸본지역 내부에서의 위치이동으로 파악하는 견해 등도 있다.
한편 천도해 온 국내 위나암의 위치는 집안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산성자산성은 집안시 북쪽 2.5㎞ 지점의 환도산(丸都山)에 위치하고 있어 환도산성(丸都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산성의 주위는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둘러싸고 있어 대단히 험준하며 성벽의 총길이는 6.951㎞이다. 산성 안에서 대규모 건물터가 조사되었는데 당시의 왕성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는 이후 압록강변의 평지에 국내성을 축조하고 도읍으로 삼았다. 따라서 고구려 중기의 왕성은 산성인 산성자산성과 평지성인 국내성의 양성체제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혼강 유역의 졸본(卒本, 桓仁)에서 압록강 유역인 국내(國內, 集安)로의 천도는 고구려사의 발전방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는 경제 · 군사적인 측면에서 여건이 좋은 압록강변의 국내로 천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아울러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중국 한나라 군현 세력으로부터 보다 멀어짐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최소화시키는 한편 압록강유역을 장악하여 그 주변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었다. 이는 곧 국가체제의 정비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동옥저(東沃沮) 지역을 비롯한 주변의 곡창지대로 진출하기 위한 육로와 수로망을 장악하여 경제적 배경을 든든히 함으로써 고구려가 태조왕 이후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