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바탕에 채색을 사용해 그린 야복 초상화 반신상(野服肖像畵半身像: 평상복 차림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이며, 현재 족자 형태로 표구되었다.
화면 상단에 '우암 송선생 칠십사세진(尤庵宋先生七十四歲眞)'이라는 제기(題記)가 있어 1680년(숙종 6) 경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모습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있는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찬문(贊文) 아래 김창협의 동생인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왼쪽 위에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찬문이 있다. 송시열의 제자인 김창협과 권상하의 찬문은 모두 권상하의 제자인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의 글씨로, 초상이 제작된 후에 써 넣었거나 후대에 초상을 모사한 후 다시 쓴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 초상화는 김창업이 그린 원본을 다시 그린 것일 가능성이 많다.『송자대전(宋子大全)』의 권150에 「서화상자경(書畵像自警: 화상에 써서 스스로를 경계하다)」이라는 찬(贊)이 있어 송시열 생시에 이미 초상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초상의 원본이 그려진 1680년(숙종 6)은 송시열이 1675년(숙종 1) 유배된 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 겸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에 임명된 해이다. 초상화에는 5년 여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정치적 영욕의 세월을 거쳐 도달한 노학자의 달관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굵은 갈색 필선으로 표현한 이목구비, 깊게 패인 주름과 골격은 짙은 눈썹, 구레나룻, 턱수염과 함께 얼굴 생김새의 특징을 잘 포착하였다. 간결하고 모난 필선의 옷 주름은 심의(深衣: 선비의 평상복)와 옷소매의 굵고 짙은 선과 대비되며 당당하고 강인한 체구의 느낌을 효과적으로 암시하면서 짜임새 있는 화면을 구성한다.
한편 김창업이 그린 초상화의 초본이 김진규(金進圭, 1658∼1716)가 그린 초본과 함께 우암 선생 사손가(嗣孫家)에 보존되어 있는데 김진규의 초본이 이 작품과 더욱 유사하다. 김창업의 초본은 복건을 쓴 모습이라 사방건을 쓴 황강영당본 초상화의 실제 초본인지는 알 수 없다.
사방건(四方巾: 조선시대 사대부나 유생들이 평상시 집안에서 쓰던 관. 아래가 좁고 위가 넓은 육면체 형태로 윗부분은 막혀있다)을 쓰고 심의를 입은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초상이다. 원래 안동 권씨 문순공파 종중의 황강영당(黃江影堂)에 봉안되어 ‘황강영당본’으로 알려졌다. 세로 92.5㎝ 가로 62㎝의 크기로, 제천의병 전시관에 위탁 관리되고 있으며, 2012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6월 보물로 승격되었다.
송시열의 사후, 그를 추모하고 받드는 영당과 서원이 여러 곳에 건립되어 많은 초상화가 봉안되었다. 이 초상화는 현재까지 전하는 10여 점에 이르는 송시열의 초상화 중 1987년 국보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과 함께 가장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초상은 충청북도 옥천 용문영당(龍門影堂) 소장의 송시열 초상을 비롯한 후대 송시열 초상의 제작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힘 있고 탄력 있는 필선과 차분한 채색의 조화로 화가의 절묘한 절제와 과장,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여 조선 후기 초상화가 추구한 사실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며 초상화 주인공의 역사적 위상, 초상화의 작품성이 모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