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식(全湜, 1563~1642)의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광해군 실정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 · 이준(李埈)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삼로(商社三老)’ 또는 ‘상산삼로(商山三老)’라 일컬어졌다. 관직은 대사간 · 대사헌 ·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 신도비는 1700년(숙종 26)에 건립되었으며 경상북도 상주시 외답동 산24-1번지(상주 시내에서 낙동 방면 국도 25호선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의 찬자(撰者)인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 『용주집(龍洲集)』 권20에 '「지사사서 신도비명(知事沙西 神道碑銘)」'이란 제목으로 신도비문이 실려 있다. 2009년 12월 28일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전식의 신도비는 비신(碑身) · 이수(螭首) · 귀부(龜趺)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수는 운룡문(雲龍紋)의 새김이 뚜렷하고 귀부도 귀갑문(龜甲紋)을 포함한 전신의 새김이 섬세하게 조식(彫飾)되어있는 반면, 비신 전면과 후면의 하단 일부가 손상되어 떨어져나갔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33㎝이며, 비신의 높이는 178㎝, 정면 폭은 80㎝, 두께는 16㎝이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증좌의정 행지중추 충간공 사서 전선생 신도비명(贈左議政 行知中樞 忠簡公 沙西 全先生 神道碑銘)”이라고 쓴 전액(篆額)이 새겨져있으며,비신은 전면과 후면에 걸쳐 작은 글씨의 해서(楷書)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1659년(효종 10)에 조경(趙絅)이 지었고, 1700년(숙종 26)에 신도비를 건립하면서 이봉징(李鳳徵)이 지은 비문 음기(陰記) 7줄을 후면에 추가로 새겨 넣었다. 글씨와 전액(篆額)은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신도비의 내용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대북(大北)의 영수였던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논박, 1625년(인조 3) 후금(後金)이 요동을 함락하고 있을 당시 해로(海路)를 통해 연행(燕行)한 일화를 포함하여 가계, 관력, 임란시의 의병 활동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신도비는 경상북도 상주 지역에서 정경세 · 이준과 더불어 ‘상산삼로’라 칭송된 사서 전식의 유학자로서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국가유산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