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사양성소(윌로우쓰) ((Willows))

근대사
단체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주 동포사회가 창립한 (한인)비행사 양성학교.
이칭
이칭
윌로우쓰비행사양성소
정의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주 동포사회가 창립한 (한인)비행사 양성학교.
개설

대한민국임시정부 공군인 비행군단을 창설하고 대일항전에서 승리하고자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에서 공군비행조종사 훈련학교로 설립하였다.

설립목적

1920년 7월 25일에 공표된 ‘비행가양성소 장정’에 “조국의 독립전쟁을 위하여 비행가를 양성함에 있다”라고 비행학교 설립 목적을 천명하고 있다. 이어 발표된 ‘비행가양성소취지서’에서는 비행사를 양성해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행사를 공급해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강조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20년에 들어와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구체적인 독립전쟁의 방략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비행기대 편성’을 정부의 당면 방침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비행기대 편성을 위해 미주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원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임시정부의 비행기대 편성 시정방침의 소식이 동포사회에 전달되자,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임명된 노백린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윤병구와 함께 항일전쟁을 수행할 공군력을 키울 것을 대외에 포고하고 비행대군단 편성을 위한 비행사의 훈련, 교육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에 군단 창설의 임무를 위임받은 대한인국민회와 군무총장 노백린은 비행훈련을 지도할 교관을 초빙하고 비행학교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1920년 2월 5일,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비행학교를 방문하였다. 당시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오림하 · 이용선 · 이초 · 한장호 · 이용근 · 장병훈 등을 만나 비행학교 창설과 운영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임시정부 산하의 비행군단 결성과 비행사 양성 학교설립을 위한 재정 대부분은 김종림이 담당하였다. ‘쌀의 대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김종림은 비행기 3대를 구입하고 자신의 농장인 40에이커(1에이커 1,224.204평) 규모의 땅을 비행훈련장으로 제공하였으며 활주로 건설과 가솔린 탱크, 천막 설치 등 모든 시설 경비 일체를 전담하였다. 그 외에도 윌로우스 애국부인회와 윌로우쓰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비행군단 창립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41명으로, 이들은 농업에 종사하거나 상회를 운영하고 있던 실업가들이다. 교관으로는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인 미국인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가 초빙되었고 캘리포니아 교육국과의 협의를 통해 1918년 폐교된 퀸스학교의 시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처음 24명의 청년들이 교육생으로 지원했으나 최종 15명이 선발되어 비행 훈련에 들어갔다. 1920년 7월 5일 ‘한인비행사양성소’라는 교명으로 개교하고 이튼날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영어명은 K.A.C(Korean Aviation Corp)였음은 비행학교가 임시정부 산하의 비행군단이었음을 대변해 준다.

학교 운영비 역시 대부분 김종림의 사유 재산에서 지출되었고 비행학교에 사원으로 참여한 이들이 월례금 10달러씩을 의연하였다. 그리고 훈련생들에게 150달러의 학비가 부과되었으나 주로 김종림의 농장에서 직접 노동하며 받은 임금으로 학비를 충당하였다.

1920년 11월 초 추수기에 불어 닥친 대홍수로 인해 일대 윌로우스 벼농장의 피해가 크게나자 비행학교의 운영도 어렵게 되었다. 북미지방총회에서는 비행학교에 대한 지원을 최대한 협조하기로 결의하는 등 다방면에서의 학교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행사양성소는 당초 기획했던 2년간의 교육일정을 채우지 못하고 1921년 4월 중순경 문을 닫고 말았다.

기능과 역할

비행사양성소는 비행훈련, 무선전신학, 비행기수선학(정비) 등의 수업 과목을 모두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었다. 제1회 졸업식은 1920년 7월 7일에 거행되었다. 레드우드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15인의 비행사 중에 우병옥·오림하·이용식·이초 등 4명이 첫 졸업생이 되었다.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비행사양성소의 훈련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초 공군 군단으로 출범하여 임시정부의 공군력을 키우고자 설립되었지만 비행군단 설립을 둘러싸고 미국 백인사회에 반발 여론이 일자, 비행사양성소라는 명칭을 내세운 것이다. 처음 선발된 15명의 훈련생들은 “동경(東京)으로 날아가 쑥대밭을 만들자”는 결의 아래 맹훈련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임시정부와 대한인국민회가 합동으로 창설한 공군비행군단의 비행학교는 비록 짧은 기간 존속했으나 공군력을 키워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서고자 했으며,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기원을 이루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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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불을 비행학교에」(『獨立新聞』, 1920.5.8)
「대한이 처음으로 가지는 비행사 6인」·「군단학교에 관하여」(『獨立新聞』, 1920.4.7)
「Korean to Have Aviation School」(『Willos Daily Journal』, 1920.2.19)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の部, 在歐米(4)』(일본외교사료관 소장, 1920)
집필자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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