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

포항제철
포항제철
과학기술
개념
철광석에서 철을 추출하여 각종 철재를 만드는 공정.
정의
철광석에서 철을 추출하여 각종 철재를 만드는 공정.
개설

철기문화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민족의 융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특히 지금까지 고대 우리 나라의 여러 유적지에서 출토된 철기 유물들이 대부분 이기류와 무기류로 구성된 것은 우리 선조들이 일찍부터 철을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는 것과, 인간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생활도구에서부터 무기류에 이르기까지 그 문화적인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역사학적으로나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제철이라는 것은 야금의 한 분야이며, 철광석으로부터 철을 추출하고 정련해서 각종 사용목적에 적합하게 그 조성 및 조직을 필요한 형태로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또한 담금질·뜨임 등의 열처리에 의해서도 사용목적에 적합한 성질의 재료가 얻어지고, 금속을 녹여서 필요한 형태로 주입, 성형하여 주물도 만들 수 있으며, 금속을 압연·단조·압출·인발하는 등의 조업에 의해 변형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야금의 기초가 되는 학문을 야금학 또는 금속공학이라 하고, 야금을 주체로 하는 공업을 금속공업이라고 한다. 금속공업은 우리 나라 중요 산업의 하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철강공업은 선진 공업국가에 이어 큰 생산량을 보유하고 있다.

고대∼고려시대의 제철

우리 나라의 제철 역사는 우리 문화의 역사와 기원을 같이하는 비교적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의해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철기문화와 동기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우리 나라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금속의 제련 및 주조 기술의 발전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이북지방에서는 낙랑군을 통해서 한대 문화가 퍼지고 북에서 내려온 철기문화가 침투하여 새로운 기술을 전파하고 있을 무렵, 멀리 낙동강 하류지방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존재했던 기술과 결합되어 높은 수준의 기술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초기 철기시대부터 내려온 제철기술의 전통 속에 새로 유입된 중국의 금속기술이 소화, 흡수된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새로운 토착문화가 낙동강 하류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김해문화(金海文化)라고 불리는 이 문화는 철의 생산을 바탕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곳에서의 철 제련기술도 당시의 어느 지역보다 우수하여 낙랑과 일본에서도 김해인들에게 철을 수입할 정도로 풍부한 제철능력을 가졌던 사회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실로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사실임에 틀림없다.

이것으로써 당시 철기문화의 융성한 단계를 알려 주는 동시에 다량의 생산량까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즉 기원전 1세기에서 4세기에 철의 제련과 철기의 제조는 이미 한반도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어느 지방 어떤 야철지(冶鐵址)에서 이러한 대규모의 제철이 생산되었는가?

우리 조상이 가진 찬란한 철기문화의 자취를 역사학적으로는 물론 기술사적 측면에서 검토할 때 고고학적으로는 가야가 출발한 기원 전후의 시기부터 300년경까지는 완전한 철기시대로 인정되고 있어, 적어도 가야의 여러 지역에서 1세기부터는 철기 사용이 보편화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후 4세기경부터는 철의 채굴·제련 기술이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의하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 사신에게 철제 40매를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철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철은 삼한·삼국시대로부터 일본과 중국에 알려져 있었으며, 원대(元代)에는 고려에 군기와 군도를 만들어 바치게 했는데, 고려는 철을 충분히 자족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고려는 996년(성종 15)에 철전을 주조해서 사용했으나 고려 중기 이후 거듭되는 전란과 금속광의 채굴, 야금에 대한 행정정책의 빈곤은 우리 나라 금속기술이 부진한 요인이 되어 서서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제철

철의 제련과 철기의 제조는 기원전 1세기에서 4세기에 이미 한반도의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철기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고대사회라 할지라도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즉, 철기의 원료인 철광석에서부터 어떤 연료를 사용하여 어떠한 철을 얻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원철이나 용철을 어떤 과정을 거쳐 철기를 제조하였으며, 또 이를 어떻게 처리하여 실용도에 알맞는 재료로 개선해 갔는가를 고찰할 때, 철은 중국에서처럼 주로 하천에 체적된 사철(砂鐵) 중에서 고품위의 것부터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사철은 근본적으로 하천 상류에서 하안으로 이동되는 동안 비중에 의하여 자연 선광(選鑛)되어 일정한 구역에 집중, 침적되므로 채광이 쉬웠을 것이다. 또한 초기 철기 유적들이 모두 철광석 및 사철층의 주변지역에 있다는 사실은 철기 출토유적지 인근에 있었을 야철지와 광석 분포의 인접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야철에 사용되는 연료는 1,000℃ 이상의 고온을 얻기에 적합한 화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야동(冶銅)과 야철의 차이점은 사용 화력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동은 1,000℃ 부근에서 용해가 가능하지만, 철은 순철의 경우 1,539℃에서 용해될 수 있고, 철 중의 탄소함유량이 증가함에 따라 차츰 용융점이 떨어져 탄소함유량이 4.3% 부근에서 1,150℃가 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적어도 야철에는 1,200℃ 이상의 화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일반 장작불의 온도는 800∼900℃ 정도이므로 화력이 높은 목탄(1,200℃ 이상)이 사용되었다고 보며, 목탄을 사용했다는 근거는 여러 유적지에서 발굴된 철기 중에서 침탄(浸炭)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침탄이 잘 되는 목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문헌상으로 볼 때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염사착기사(廉斯鑡記事) 중 한인 포로의 벌목 사실을 야철용 목탄제조와 연관시켜 본 구보타(窪田藏郎)의 설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또 초기에는 철은 주로 자연 통풍을 이용했겠으나 보다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가풍(加風)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풀무와 같은 송풍장치가 만들어지면서 인력으로 가풍하였다.

그 뒤 노(爐)가 대형화됨에 따라 고대 중국에서와 같이 축력을 이용하는 단계를 거쳐 수력으로 발전해 갔다고 본다. 그 다음으로 야철을 하는 노를 축조하는 내화재료는 고대사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토기제품에 주로 사용되던 점토라고 볼 수 있으며, 내화도는 1,600℃ 이상이므로 당시의 야철 온도는 충분한 내화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철기시대의 철기 유물은 주철기와 단철기로 크게 구분된다. 철기의 재질면에서는 강(鋼)과 주철로 양분되는데, 주철기는 화학성분상 탄소함유량(2.0%C 이상)이 높다는 것 이외에 주조상태로써 단철기와 쉽게 구분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화력이 불충분하여 용융상태에서 강을 제조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목탄을 사용하여 저온 환원해서 얻은 다공질의 철편을 반복단타함으로써 저탄소의 강을 얻었다.

고대 공인들도 철을 제조할 때 단순하게 청동기의 형태만 모방한 것은 아니다. 청동기와 철기로 대체된 데는 장기간의 공용과정을 거치는 동안 재질이나 강도면에서 철기가 당연히 우세하다는 사실을 터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철기가 순철이나 환원철상태에서 그렇게 높은 강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이에 부응하는 강화기술이 수반되어야 했다.

고대 야철에서 철을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반복단타·침탄 및 열처리를 들 수 있다. 주철은 탄소함유량이 높기 때문에 융점이 강보다 낮아지며, 탄소함량이 4∼5%일 경우 철은 1,200℃ 정도에서 용융된다. 강의 제조와는 달리 목탄분을 계속 공급하고 가풍함으로써 노의 온도를 높게 유지하여 용선을 얻었을 것이다.

고대사회의 제철 형성과정에 대한 기술적 고찰에 대해서는 윤동석(尹東錫)이 발표한 <한강유역의 초기 철유물에 대한 금속학적 해석 및 가야유적에서 출토된 철기유물의 실험금속학적 연구>·<패총유적에서 발굴된 초기 철유물에 대한 금속학적 연구>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제강

고대 공인들은 다음과 같은 공정으로 강을 제조하였던 것 같다. 철기시대에 들어서도 목탄에 의한 장입방법 내지 가열방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여 철광석의 활발한 환원온도인 1,000℃ 부근 또는 선철의 용융온도인 1,200∼1,300℃ 정도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이러한 정도의 화력으로 제조할 수 있는 철은 제조공정상 큰 제약을 받게 되었으며, 고대사회에서는 화력이 불충분하여 용융상태에서 강을 제조할 수 없었다.

따라서 목탄을 사용하여 저온(800∼1,100℃)에서 환원하여 환원철(괴련철)을 제조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환원철은 해면형 내부에 다량의 목탄분을 내포하고 있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철의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로(竪爐)에서 갓 꺼낸 상태 또는 가열로에서 다시 가열하여 다공질의 해면질을 반복단타함으로써 내부의 개재물이 압출되고 결정립이 균일미세화되어 강성(鋼性)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괴련강은 조직적으로 볼 때 주로 페라이트(ferrite)기지로 되어 재질이 연하므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반복단타 또는 침탄방법 등이 이용되었다.

이것은 괴련강을 목탄분 속에서 1,000℃ 이상으로 장시간 가열한 뒤 반복단타함으로써 표면의 탄소가 침투되어 강한 페라이트조직을 형성하여 경도가 상승된다.

물론, 그 당시에는 침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다량의 목탄을 사용하여 장시간 가열한 뒤 많이 두들겨야 강해진다는 경험을 토대로 했을 것이다. 즉, 저탄소강의 경우는 저온 환원철(괴련철)로부터 반복단타나 침탄 강화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삼국 초기 유적지인 구관동의 철끌[鐵鑿]이 표면 침탄이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철끌을 제조하는 가열로가 목탄 가열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오륜대 철칼·오륜대 철끌·부산 모명동 철도끼·약목동 철기 등은 화학성분상 0.26∼0.36%의 저탄소강에 속하며, 현미경 조직사진상 반복단타한 조직으로 보아 그러한 사실이 뒷받침된다.

다만 마장리 철편이나 풍납리 꺾쇠의 경우 탄소함유량이 각각 0.92∼1.32%인데, 이들의 근원이 침탄 강화에 의한 것인가 혹은 용철의 탈탄(脫炭)에서 유래된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다.

또 다른 강화방법의 하나가 열처리인데, 저탄소강의 경우는 이보다 더 강도를 높이기 위해 그 당시는 단지 단타작업이 끝난 뒤 물 속에 급랭시키는 방법을 썼을 것이다. 이렇게 물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강도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지금도 우리 나라의 대장간에서 도끼나 칼·낫 따위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부원동의 인자편(刃子片)과 능천의 철족으로,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물 담금한 재료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특히, 능천 철족의 경우 자루 부위는 공랭한 조직인 페라이트이고, 날 부위는 담금질한 마르텐자이트조직(martensite組織)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날 부분만 강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는바 그 뜻이 한층 깊다고 생각된다.

선철

선철은 괴련철과는 달리 환원괴로는 제조가 불가능하며 용탕으로 얻어질 수 있다. 괴련철에서 강을 제조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고, 다량의 철을 한꺼번에 생산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는 방법이 선철제조이다. 선철은 탄소함량이 높기 때문에 융점이 강보다 낮아진다. 4∼5% 범위의 철은 1,200℃ 부근에서 용융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로 고대사회에서 용선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경우는 강의 제조와는 달리 용탕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용탕을 얻기 위해서는 노의 규모도 커지고 노 안의 온도도 높아야 하므로 장시간 가열을 실시했고, 또한 목탄을 계속 첨가하여 고온 환원과 동시에 용융 침탄이 수반되었다. 그 결과 용융점이 떨어져 1,200℃ 정도에서 용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공인들이 용선중에 탄소함량이 증가하는 것이 용융점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는 볼 수 없으며, 다만 목탄분을 계속 첨가함으로써 노 안의 온도를 올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철이 녹아서 용선을 형성할 때까지 가풍과 목탄분을 계속 첨가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얻은 용선을 노의 저부에 설치된 탕도를 통해 주형에 주입하여 가래·도끼·끌 등의 주철물을 얻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백주철로서 매우 취약하기 때문에 생활용구로는 제한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조된 것이 한강 유역의 초기 철유물로 대심면(大心面)의 도끼, 풍납동의 철편, 구의동의 보습이다. 이들은 모두 취약한 백주철의 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주로 초기단계에서 사용되었고, 반주철 및 회주철로 개선되었을 것이다.

가야 패총에서 출토된 성산북구(城山北區) 철편(백주철)과 능천(能川) 철편 및 예안리(禮安里) 철편(반주철), 운성리(雲城里) 차축머리[車軸頭, 회주철]가 있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대부분의 철기가 백주철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조 후 냉각속도가 빨라 흑연 생성이 억제된 것으로 보이는데, 냉각속도가 빠른 이유는 그 당시에 출토된 철기유물의 두께가 모두 얇아서인지, 또는 주철기의 화학성분이 철·탄소계의 공정 조성에 가까우므로 용철이 고체상태로 변태하는 응고 구간이 매우 좁아진 까닭에서인지는 판단하기가 곤란하다.

조선시대의 제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조정은 초기부터 금속광을 채굴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철장(鐵場)은 안동·합천·용궁·산은·무주·영덕·무안·고산 등 17개소가 있었다. 이들 철장, 즉 제련소에서는 농한기에 광석을 취련(吹鍊)하여 상납하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서서 약 5세기 동안은 각종 지하자원의 채광·제련이 자주 일어나려다가도 조정에 의해 금압(禁壓)되어 왔는데, 이는 동시대에 일본이나 유럽이 광업을 육성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인접국인 일본은 도요토미 막부시대(豐臣幕府時代)에 벌써 지하자원의 채굴 및 제련기술 등을 보호, 육성하여 군기 등을 다량 생산하게 되었으며,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그 뒤 조선 말엽에 마침내 우리 나라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개항 이전 조선 초에서 중엽까지의 제철 및 철광석의 채굴에 대해 요약하면, 1439년(세종 21)에는 일본에서 철공을 불러왔으며, 성종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제철 부분에서도 금·은과 마찬가지로 거의 채굴이 정지된 상태였다.

1424년 당시에 가장 풍부한 철산지로 알려진 황해도 서흥에서 철광을 채굴하여 제련한 정철(正鐵)의 생산량(헌납량)이 584t이라고 하니 많은 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철의 생산은 그 뒤에도 여전히 부진하여 1502년(연산군 8)에도 서북도에 파견된 군사 가운데 철갑을 착용한 자가 아주 적은 정도였다.

조선에 들어서서 지하자원의 채굴 제련이 조정에 의해 금압되었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후 병기의 부족을 느껴 철광석의 채굴을 명했지만 육성조차 없이 당시 병기용 주물마저 부족한 정도였으며, 1607년까지도 무기조차 완전히 갖추지 못했을 정도였으므로 제철 분야도 정체상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600년대에 이미 중화기의 철통(鐵筒)에서 발사되는 각종 탄환에 철탄자·진천뢰(震天雷) 등 철제품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철의 생산용 용해로나 주물용 기구 등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나 그 상세한 내용은 할 수 없다.

19세기에는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로 바뀌어 광산 경영은 민채(民採)가 주가 되었으며, 철광물도 다른 광물과 더불어 채굴이 활발하였다. 제철기술·주조기술·단야기술 등 전통적으로 내려온 우수한 기술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근대적 기술의 기초를 형성하는 일 없이 발전하지 못한 채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조선에서는 광물의 채광 자체를 조정에서 금지시켜 온 결과 제철 분야도 정체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제철기술은 15세기를 고비로 점차 그 비약의 기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전후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조선에 극심한 피해를 입혀 절정에 달했던 15세기 조선의 과학은 거의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게 위축되어 갔다. 모처럼 자리잡혀 가던 과학기술이 안정을 잃은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제철

1905∼1945년은 일본에 의해 우리 나라가 간섭, 통치를 당하던 시대이며, 모든 일은 일본인에 의해 그들의 필요에 따라 수행되었고, 우리 나라 사람은 여기에 끌려가는 처지에 있었다.

일본 자본에 의한 제철공업은 장치공업에 속하기 때문에 입지조건만 적당한 경우에는 비교적 초기부터 건설이 추진되어 왔다. 제1차세계대전 발발로 철강재 수요가 왕성한 관계도 있어 1913년에 겸이포제철소가 건설되었다.

그 뒤 제1차세계대전 종식과 군축으로 정체상태에 있다가 1937년경부터 급격하게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우리 나라 철강공업이 비교적 근대화된 것은 1941년을 전후해서 일본이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군사적·경제적인 필요를 느껴서 건설한 흥남제철소와 삼화제철소 등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제2차세계대전 말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공장이 설립되었다.

특히, 이 분야에서는 제품이 군수품생산에 직결되는 소재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람은 접근하기 어려웠고, 오로지 노력을 제공하는 처지에 불과하였다. 그 건설상황은 1945년을 기준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13년 일본 미쓰비시(三菱)합자회사에서 겸이포제철소를 착공(150t 고로 2기), 1918년 6월 겸이포제철소에서 출선을 개시(선철 50만t/연)했으며, 1919년 3월 겸이포제철소에서 제강공장을 가동(강재 30만t/연), 1922년 제1차세계대전의 종결과 군축으로 겸이포제철소 가동을 중단했다가, 1934년 5월 11년 만에 조업을 재개하였다.

1937년 8월 일본 고주파중공업(주)에서 성진전기로공장을 건설하여 특수강과 합금철을 생산했고, 1939년 삼강제강소(지금의 성원제강)가 설립되었으며, 1937년 미쓰비시광업(주)이 청진공장을 건설하여 그룹식 회전로에 의한 루페(lupe)생산을 시작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이연금속(주)에서 인천공장(지금의 인천제철주식회사)을 건설하여 이연식 회전로 조업을 시작, 특수강을 생산하였다. 같은 해 흥남제련소에서 밧세법에 의해 철강 일관작업을 개시했으며, 미쓰비시 재벌에서 조선제철(주) 평양공장을 건설하였다.

와타나베주강회사(渡邊鑄鋼會社)에서 해주와 평양공장에 소형 용광로 5기를 건설했으며, 가토제철소(加藤製鐵所)에서 부평에 소형 용광로 1기를 건설하고, 고히라광업소(小平鑛業所)에서 사리원에 소형 용광로 10기를 착공하였다.

1942년 5월에는 일본제철(주) 청진공장이 조업을 시작하였으며, 1943년 4월에는 일본의 사이센제철회사(齋川製鐵會社)에서 삼척에 20t 용광로 9기를 건설하였다(지금의 동국제강 삼척공장).

광복 후 국토가 둘로 갈라지고 광물자원 개발이 미흡하여 1962년 후의 제1·2차 경제개발을 거쳐 제3차 경제개발의 중화학공업정책으로 1973년 7월 포항종합제철(주)이 조강생산 103만t의 제1기 설비를 종합 준공한 이래 설비 확장을 거듭하여 1981년 2월에는 제4고로 화입 및 제4기 설비 준공으로 조강연산 850만t 체제를 구축하였다.

또한 1983년 6월 제4기 설비 2차 확장공사 준공으로 조강연산 910만t 규모의 국제적인 대형 제철소를 갖게 되었으며, 현대 제철기술의 기간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제조기술의 도입, 소화 또는 자체 개발에서 경이적인 발전을 성취하였다.

특히 1981년 11월 제2제철소를 전라남도 광양만으로 확정 발표하여 1985년 7월에 조강연산 270만t 규모의 고로 1기를 착공하여 1987년 4월에 완공하였으며, 그 후 1988년 7월에 제2기, 1990년 12월에 제3기, 1992년 9월에 제4기, 1999년 3월에 제5기가 준공되었다.

기타 철강업체에서도 설비능력의 신설·확장 및 개선과 대형화로 증가 추세에 있으며, 우리 나라의 제철기술은 2000년대의 중화학공업시대를 바라보며 바야흐로 약진기로 접어들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1997년 말 기준 국내 철강업계의 설비능력은 제선 2174만 4000t, 제강 4335만 4000t(전로 2115만 4000t, 전기로 2,220만t), 열간압연 4675만 4000t, 냉간압연 1104만 9000t, 표면처리 강판 526만t, 강판 50만 5000t, 선재 2차 가공 134만 4000t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1993년 3월에 광양 제5기가 준공되었으므로 291만t의 연간 생산능력이 증가할 것이다. 광복 후의 제철 상황은[표 1]과 같다.

우리 나라의 선철생산은 1972년도에 1,400여t에 불과하던 것이 1973년에 포항종합제철(주) 1고로 준공을 기점으로 1979년에는 5,000만t에 달했으며, 광양제철소 1기 준공 해인 1987년에는 1,000만t대를 돌파하였다.

1992년 9월에 준공된 광양 4기 가동에 힘입어 1993년에는 전년대비 12.7% 증가한 2,177만t을 생산 2,000만t대를 상회하는 생산체계를 갖추었다.

이와 같은 설비 확대로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연평균 21.4%의 생산 증가를 나타냈으나, 1994년에는 3개월 동안의 포항제철소 4고로 개수공사 여파로 전년대비 2.8%의 감소를 보였으며, 1995년에는 다시 5.5%의 증가를 나타냈다.

1996년에는 1995년 11월에 준공된 포항제철소의 연산 60만t 규모의 코렉스 공장에서 55만t의 선철이 생산되어 전년대비 3.0%가 증가, 2,300만t대를 돌파하였다.

1997년에도 코렉스 공장에서 68만t이 생산되는 등 선철의 생산은 비교적 순조로운 상황이었으나 4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 포항제철소의 2고로 대보수 영향으로 전년대비 1.3% 감소한 2271만 2000t에 머물렀다.

1997년의 선강비율(선철생산/조강생산)을 보면 53.4%로 선철생산이 감소하고 조강생산은 증가, 선강비율도 1996년에 비해 5.7% 감소를 보였다. 이는 세계 평균 선강비율 68.6%보다 15.2%를 하회하는 실정으로 제강용 선철 수입이 전년대비 52.1% 증가한 369만t을 기록한 데 따른 것이다.

한편, 선철의 연대별 증가 추세를 보면 1970년대에는 연평균 67.4%의 증가를 보였고, 1980년대에는 11.5%, 1990년대에는 5.8%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는 포항제철소 1기에서 광양제철소 4기까지와 코렉스 설비 증설에 의한 것으로 포항제철소 1024만 4000t, 광양제철소 1,150만t 등 총 2174만 4000천t의 연간 능력을 보유한 데 따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 나라의 누계 출선량은 1989년 1억t을 돌파한 이후 1994년에 2억t대를, 1997년에는 2억 7515만t을 선회하고 있으며, 현재도 포항제철소 4기의 고로와 주물선 고로, 신제선 코렉스 공장과 광양제철소 4기 등 총 9기의 고로에서 1일 약 6만 2000t의 제강용 선철과 1,000t 정도의 주물용 선철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조강생산은 1960년대까지는 고철을 주원료로 하는 재래식 전기로 및 평로 제강법에 의해 생산해 오다가, 1973년 6월 포항제철소 1기 준공과 함께 전로법에 의한 제조방법이 주공정으로 됨에 따라 우리 나라 조강생산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강생산의 성장은 선철 생산추이와 마찬가지로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준공부터 1988년 7월 광양제철소 2기 준공까지의 연속적인 확장과 전기로업체의 설비 증설, 자동화 및 노후설비 개체 등 지속적인 설비 합리화로 인하여 1980년 856만t에서 1990년 2,313만t으로 10년 동안 2.7배가 증가, 연평균 10.5%의 생산증가율을 나타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광양제철소 3, 4기의 준공 가동과 전기로업체의 계속적인 설비투자로 1993년에는 3,303만t으로 전년대비 17.7% 증가하는 등 세계 6위로서 3,000만t대에 진입한 뒤, 1994년에는 포항제철소의 4고로 개수공사 영향으로 전년대비 2.2%의 낮은 증가를 보이기도 하였다.

1995년에는 포항제철소 전로 제강의 정상 가동과 한보철강의 당진공장 준공 및 대한제강·인천제철·동국제강 등의 설비 증설, 보수 완료의 영향으로 전년대비 9.0% 증가한 3677만t을 생산하였다. 이어 1996년에도 상반기까지는 8.6%가 증가하여 전년 증가율 수준을 유지하였다.

하반기에 들어 경기 침체에 의한 수요 부진으로 조강류를 중심으로 철강제품이 공급 과잉을 보임에 따라 전기로 제강사들이 조업을 단축하여 8월 포항제철소 스테인리스 전기로 공장과 광양제철소 1미니밀, 강원산업의 증설이 9, 10월에 완공되고, 기아특수강의 전기로 공장설비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상반기 생산량을 밑돌게 됨으로써 하반기 증가율은 전년비 3.1%의 수준에 머물러 연간으로는 3,890만t이 생산되었다.

1997년에는 상반기 한보철강 및 삼미특수강의 부도에도 불구하고 전기로강의 설비 증설로 5.4%가 증가하였고, 하반기에는 포스코 미니밀의 가동률 행상, 한보철강의 정상 가동, 창원특수강의 가동률 향상으로 13.4%가 증가하여 연간으로는 전년대비 9.4%, 365만t이 증가한 4255만 4000t을 생산, 처음으로 4,000만t대를 돌파하였다.

우리 나라의 제철산업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여 1997년 말 현재 조강생산은 전세계 6위의 생산능력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이와 같은 추세로 간다면 머지않아 세계 유수의 철강생산국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
『근세한국산업사연구』(고승제, 일한도서, 1959)
『한국의 고대과학』(전상운, 탐구당, 1997)
『한국철강연감』(한국철강협회, 1991∼1998)
『철강통계연보』(한국철강협회, 1991∼1999)
관련 미디어 (4)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