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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역전투(開平驛戰鬪)

고려시대사사건

 1216년(고종 3) 고려군이 거란 유민(契丹遺民)과 개평(開平)에서 벌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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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216년(고종 3) 고려군이 거란 유민(契丹遺民)과 개평(開平)에서 벌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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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고종 때 고려는 개평역전투 이전에는 대개 변방의 소규모적인 전투와 승리만이 있었을 뿐, 큰 전과는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부터는 규모가 커지고, 고려군의 조직적인 전투참여로 거란적들이 소탕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거란은 1212년(강종 1) 야율유가(耶律留哥, 耶律瑠格)가 금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융안(隆安)주 02)에 자리잡으니 그 무리가 10만이 넘었다. 유가는 한때 도원수로 추대되어 요왕(遼王)으로 불리었으나, 원 태조(징기스칸)를 받들게 되어 그의 지위는 야사불(耶斯不, 耶斯布)에게 넘어갔다. 이어 야사불이 그의 부하에게 피살당하자 승상 걸노(乞奴)가 무리를 이끌고 스스로 감국(監國)이라 칭하고 거란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거란 유민을 배반하고 몽고에 항복했던 야율유가가 몽고군의 선봉장이 되어 걸노를 치니, 걸노는 9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게 되었다. 이것이 고려 후기에 있어 고려와 거란간의 최초 충돌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과와 결과
1216년 거란 유민군은 압록강을 건너 대부영(大夫營)으로 진격하였는데, 그들은 고려의 북계병마사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리기를 “양식을 주면 강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이며, 뒷날 황기(黃旗)를 세워놓으면 고려에서 나와 황제의 조칙을 들으라.”고 하였다. 고려가 이에 응답하지 않자 그들은 영주(寧州)·삭주(朔州) 등의 여러 진(鎭)을 공격해 재물·곡식 등을 빼앗아갔다.
이에 노원순(盧元純)·오응부(吳應富)·김취려(金就礪)를 각각 중군·우군·후군 병마사로 삼아 거란적을 막게 하였다. 그 해 9월 적이 청천강 방면으로 침입하자 조양진(朝陽鎭)주 03)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은 이를 격파하고, 다시 연주(璉州)주 04)·창주(昌州)주 05)·구주(龜州)주 06) 등 각지에서 거란적을 격파하였다. 특히 김취려는 개평에서 적을 크게 물리쳐 치명적 타격을 가해 적군은 청새진(淸塞鎭)주 07) 밖으로 도망하였다.
이미 거란적은 개평역과 원림역(原林驛)에 둔치고 있다가 신기(神騎)의 장수에게 패한 바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군사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전세를 가다듬으니 이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고려는 삼군이 도착하였음에도 감히 진전하지 못하다가, 후군의 김취려가 장군 기존정(奇存靖)과 더불어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면서 적군을 치니 거란군사가 무너졌다. 뒤이어 김취려가 적을 추격해 개평역을 지나자, 역의 북쪽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급히 중군을 기습하였다.
이에 고려군사들이 다투어 나아가 싸워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고려와 거란 유민과의 전쟁 중 최초의 대규모적인 것으로, 이에 고려가 승리함으로써 거란적의 기세를 크게 약화시켰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주석
주01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
주02
만주 농안부근
주03
평안남도 개천 신송리토성
주04
평안남도 개천
주05
평안북도 창성
주06
평안북도 구성
주07
평안북도 희천군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한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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