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 ()

개신교
개념
7세기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유입되어 교세(敎勢)를 확장하다가 9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나타낸 명칭.
이칭
속칭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이칭
에르케운(也里可溫)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교는 7세기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유입되어 교세를 확장하다가 9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나타낸 명칭이다. 9~12세기에 동방 시리아 교회는 중앙아시아와 몽골리아 초원의 투르크계와 몽골계 부족들에게 전파되었고, 이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몽골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방 시리아 사제는 에르케운(也里可溫)이라고 불렸다. 경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추정 가능하지만,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고려시대에 한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키워드
정의
7세기에,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유입되어 교세(敎勢)를 확장하다가 9세기 중엽에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나타낸 명칭.
경교와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

635년에 동방 시리아 교회 선교사들이 실크 주1를 따라 당나라 주2에 도착했다. 시리아 교회는 시리아어를 예배와 신학의 언어로 사용하는 교회이다. 그 기원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주3주4의 영토에 걸쳐서 존재했다. 4세기 초, 로마제국에서 주5주6, 페르시아제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게 되었다. 5세기부터 페르시아제국 안에 있는 교회는 로마제국의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발전한다. 이때부터 시리아 교회는 둘로 나뉘어, 페르시아제국 안에 있는 교회는 동방 시리아 교회라고 불린다. 동방 시리아 교회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로 알려져 있는데, 주7는 동방 시리아 교회와 연관이 없고 시리아어도 알지 못했다. 이 명칭은 적대자들이 주8의 뜻으로 붙여준 이름이다.

당대의 경교

동방 시리아 교회는 실크 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 인도와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 인도에서는 토마 교회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는 635년에 당나라 장안에 도착했는데, 처음에는 “파사경교(波斯經敎)”라고 불리다가 후에 “경교”라고 불렸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781년)에 따르면, 경교는 638년에 황제의 주9를 받아 의녕방에 예배당을 짓고 선교사〔僧〕 21명을 두었다. 경교는 고종 때에 계속 발전하여 사원이 100개 도읍에 가득했다고 전한다. 경교는 주10 시대(698~699년)에 불교에 의해, 예종 때인 712년에는 도가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 현종의 즉위(713년)와 더불어 경교는 다시 발전했고 781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755년,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중국에서는 외래 종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고, 마니교의 박해(843년), 회창폐불(845년)이 일어났으며, 황소의 난(878년)에서는 광동에서 12만 명의 외래 종교를 가진 상인과 종교인이 살해되었다. 이후 경교는 중국 본토에서는 거의 종적을 감추었다.

당대 경교의 주요 자료로는 주11 이외에도 『일신론』, 『서청미시소경』, 『선원지본경』, 『지현안락경』, 『대성통진귀법찬』, 『경교삼위몽동찬』, 『존경』 등 한문 문헌과 주12에서 발견된 『선원지본경』 석비가 있다.

몽골 제국의 에르케운

경교는 9~12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몽골리아 초원의 투르크와 몽골계 부족들에게 전파되었다. 13세기 초, 칭기즈 칸(Chingiz 주13이 몽골 주14을 건설할 때, 주15의 웅구트족, 몽골리아 초원의 케레이트 부족, 주16 부족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부족들은 정치 동맹과 혼인 관계를 통해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 동방 시리아 교회는 제국의 보호를 받았으며, 동방 시리아 사제들은 "에르케운〔也里可溫〕"이라고 불렸다.

몽골 제국의 종교정책에 힘입어 동방 시리아 교회는 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지로 널리 전파되었다. 마르코 폴로(Marco 주17주18주19. 카슈카르, 주20, 주21, 긴긴 탈라스, 숙주(肅州), 감주(甘州), 에르주울〔凉州〕, 실링주〔西寧〕, 에그리가야〔銀川〕 등지에 동방 시리아 교인이 존재했다고 알려준다. 또한 동방 시리아 교회는 만주(Tangut) 지방까지 전파되었다.

경교의 한국 전래 가능성

당나라와 삼국, 특히 통일 신라와 밀접한 관계에 비추어볼 때, 경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일본에서는 주22 성무천황기(聖武天皇紀)에 736년 당나라 사람 황보(皇甫)가 페르시아인〔波斯人〕 이밀예(李密翳)〔밀리스(Millis)〕를 동반하여 주23을 만났다고 나오는데, 이밀예(밀리스)를 경교 선교사로 보는 시각이 있다. 국내에서는 경교의 전래를 알려주는 문헌 증거는 없다. 다만 경상북도 영풍(현, 영주시)에서 발견된 석상, 경주 불국사(慶州 佛國寺)에서 출토된 돌 십자가 1점, 경주에서 발견된 철제 주24 장식 2점과 ‘성모 마리아상’ 등이 경교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출토 경위가 분명치 않아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이 중에서 학술적 분석이 이루어진 것은 성모 마리아상 하나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이 주25은 마리아상이 아니라 아이의 출산과 안녕을 관장하는 불교 신상인 주26이며 89세기가 아니라 1214세기에 제작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유물들을 통해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전래하였다고 주장하긴 어렵다.

반면 몽골 제국시대에 고려에 들어온 동방 시리아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정동행성(征東行省)평장정사(平章政事)로 임명된 기와르기스〔闊里吉思〕이다. 그는 1300년에 고려의 노비제를 폐지하라고 주장했지만, 고려 귀족들의 반발로 이듬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원나라 세조 주27의 딸이며 충렬왕(忠烈王)의 왕비로 조선에 온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제국대장공주)은 경교 신자였다. 하지만 제국대장공주는 고려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통일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경교가 일반 사회에 영향을 준 증거는 찾기 어렵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광수, 『한국기독교전래사』 (기독교문사, 1974)
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까치, 2002)
오윤태, 『한국기독교사: 동방으로 전래된 기독교』 (혜선문화사, 1973)
크리스토프 바우머 저, 안경덕 역,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 교회의 역사』 (일조각, 2016)
황정욱, 『예루살렘에서 장안까지: 그리스도교의 당 전래와 경교 문헌과 유물에 나타난 중국 종교의 영항에 대한 연구』 (한신대출판부, 2005)

논문

소현숙, 「숭실대 소장 九子母像 연구: '마리아상'으로 알려진 塑像의 圖像과 제작시기를 중심으로」 (『신라사학보』 19, 신라사학회, 2010)
주석
주1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여 중국과 서아시아ㆍ지중해 연안 지방을 연결하였던 고대의 무역로. 고대 중국의 특산물인 명주를 서방의 여러 나라에 가져 간 데서 온 말이다. 우리말샘

주2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의 옛 이름. 한(漢)나라ㆍ당나라 때 도읍지였던 곳으로, 뤄양(洛陽)에 견주어 서도(西都) 또는 상도(上都)라고도 한다. 우리말샘

주3

기원전 7세기에 이탈리아반도 중부의 테베레강 유역에 라틴인이 세운 서양 고대의 최대 제국. 고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하여 왕정, 공화정, 제1ㆍ2 차 삼두 정치를 거치다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통일하여 제정을 실시하고, 오현제 시대에 최대 판도를 이루었다. 395년에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는데,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하였고 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말샘

주4

기원전 559년에 키루스 이세가 현재의 이란 땅에 세운 나라. 다리우스 일세 때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5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훈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천지 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섬기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다.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다시 페르시아ㆍ인도ㆍ중국 등지에 전해졌다. 11세기에 그리스 정교회가 갈려 나갔고,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교인 가톨릭교와 신교로 분리되어 현재 세 교회로 나뉘어 있다. 우리말샘

주6

국가나 공공 단체 또는 사회단체 등이 어느 행위나 물건에 대하여 인정하다. 우리말샘

주7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대주교(?~451). 네스토리우스파의 시조로, 그리스도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따로 가진다고 주장하여 431년 에페수스 종교 회의에서 이단자로 선고를 받고 추방당했다. 우리말샘

주8

가치를 깎아내림. 우리말샘

주9

임금이 신하의 청을 허락함. 우리말샘

주10

중국 당나라 고종의 황후(624?~705). 성은 무(武). 이름은 조(曌).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제(女帝)로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쥐고, 두 아들을 차례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성신 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우리말샘

주11

781년에, 중국 당나라 장안의 경교 사원인 대진사에 건립된 비석. 중국에 전래한 경교의 교리와 역사를 적어 그 유행을 기념한 것이다. 우리말샘

주12

중국 허난성(河南省) 서북부에 있는 성 직할시. 화베이평야(華北平野)와 웨이수이강(渭水江) 분지를 잇는 요지로, 룽하이 철도(隴海鐵道)가 지난다. 광산 기계ㆍ트랙터ㆍ방적 따위의 공업이 활발하며, 부근에서 목화가 많이 나고 석탄ㆍ금속 자원도 풍부하다. 예로부터 여러 왕조의 도읍지로 번창하여 명승고적이 많다. 우리말샘

주13

몽골 제국의 제1대 왕(1167?~1227). 본명은 테무친. 한자식 이름은 성길사한(成吉思汗). 몽골족을 통일하고 이 칭호를 받아 몽골 제국의 칸이 되었다. 중앙아시아를 평정하는 한편, 서양 정벌로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재위 기간은 1206~1227년이다. 우리말샘

주14

13세기 초에 칭기즈 칸이 현재의 외몽골을 중심으로 하여 아시아와 유럽 양 대륙에 걸쳐 세운 제국. 몽골과 중국 본토를 직할령으로 하고 정복지를 네 개의 한국(汗國)으로 나누어 지배하였으며, 세조 때에 북경(北京)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원(元)으로 고쳐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4세기 말에 명나라에 쫓기어 패퇴하면서 제국도 분열하였다. 우리말샘

주15

몽골의 영역 가운데 고비 사막 남쪽의 옛 이름. 우리말샘

주16

10세기부터 13세기에 알타이산맥 지방과 그 서쪽에서 활약하던 튀르키예계 유목 민족. 또는 그들이 세운 나라. 1204년에 칭기즈 칸의 침략을 받아 패하고 서쪽으로 옮겼으나, 1218년에 몽골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7

이탈리아의 여행가(1254~1324). 베네치아 사람으로 1271년에 아버지를 따라 동방 여행에 나섰으며, 몽고의 상도(上都) 카이핑(開平)에 가서 쿠빌라이의 우대를 받으며 17년간 아시아와 인도의 통상을 전담하였다. 1295년 제노바와의 싸움에 참가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 ≪동방견문록≫을 구술하였다. 우리말샘

주18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가 동방을 여행한 체험담을 기록한 여행기. 1271년에서 1295년까지 동방의 여러 나라를 거치고 중국에 17년 동안 머무르면서 보고 들은 것을 1298년에서 1299년까지 제노바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루스티켈로로 하여금 받아 적게 한 것으로, 유럽 사람들의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말샘

주19

우즈베키스탄 동부, 아무다리야강 유역에 있는 도시. 실크 로드의 기지로 번영하였으며, 14~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다. 목화의 집산지이며, 기계ㆍ화학ㆍ목화ㆍ피혁 따위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우리말샘

주20

고대 서역 지방의 국가. 옛 실크로드의 남로(南路)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우리말샘

주21

6세기에서 14세기에 중국 서북부에서 활약하던 티베트계 유목 민족. 11세기에 서하(西夏)를 세웠는데, 13세기에 몽골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22

‘쇼쿠니혼기’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 우리말샘

주23

일본에서, 그 왕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24

‘十’ 자 모양으로 된 무늬. 우리말샘

주25

찰흙으로 만든 형상. 중국 당나라 때에는 불상이 찰흙으로 많이 만들어졌으며, 지금은 주로 조각, 주물의 원형으로 사용된다. 우리말샘

주26

해산과 유아 양육을 맡은 신. 만 명의 자식을 두고도 늘 남의 어린아이를 잡아먹으므로 석가모니가 그의 막내아들을 숨겨 놓고 훈계하여 귀의하도록 하였다. 어린아이를 품고 석류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말샘

주27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중국 원나라의 시조(1215~1294). 묘호(廟號)는 세조. 중국 이름은 홀필렬(忽必烈). 칭기즈 칸의 손자로, 일본ㆍ중앙아시아ㆍ유럽에까지 원정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몽고인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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