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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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연구기관.
내용 요약

국문연구소는 1907년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 연구 기관이다. 1905년 지석영이 소청한 「신정국문」과 1906년 이능화가 학부에 제출한 「국문일정의견」이 계기가 되어 설치되었다. 이 기관에서는 공동 연구에 의한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개설 당시 위원장 윤치오, 위원 장헌식·이능화·권보상·현은·주시경·우에무라가 임명되었다. 연구소 개설 이후 이 기관의 위원 장헌식, 현은 등이 해임되고 어윤적, 지석영, 이민응 등이 추가로 선임되었다. 이 연구소의 위원들은 협동적인 노력의 결정이자 개화기 국어 연구의 총결산인 「국문연구의정안」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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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7년 학부 안에 설치한 한글연구기관.
내용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崐)주1로 각의를 거쳐 그해 7월 8일에 설치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정음청(正音廳) 설치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기관이라 할 수 있다. 설립동기는 19세기 말엽부터 문자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개별적인 노력은 있었으나, 공동연구에 의한 통일된 문자체계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데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로서는 1905년 7월 지석영(池錫永)이 소청한 「신정국문(新訂國文)」을 정부가 재가하여 공포한 결과, 그 내용에 담긴 결점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906년 5월에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학부에 제출하여 우리 나라 문자체계의 통일을 역설한 것을 들 수가 있다. 「국문연구소규칙」 제1조에 “본소에서는 국문의 원리 및 연혁과 현재의 행용(行用) 및 장래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조직은 개설 당시 위원장에는 학부 학무국장 윤치오(尹致旿), 위원으로 학부 편집국장 장헌식(張憲植),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 교장 이능화, 내부 서기관 권보상(權輔相), 그리고 현은(玄櫽) · 주시경 및 학부 사무관이었던 일본인 우에무라(上村正己)가 임명되었다. 한달 뒤인 8월 19일 학부 편집국장이 경질되면서 장헌식이 해임되고, 어윤적(魚允迪)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9월 16일에 첫 회의를 열어 「국문연구소규칙」의 작성과 위원의 보선을 논의하여 9월 23일자로 이종일(李鍾一) · 이억(李億) · 윤돈구(尹敦求) · 송기용(宋綺用) · 유필근(柳苾根) 등 5명이 새로 임명되었다. 1908년 1월에는 지석영이, 6월에는 이민응(李敏應)이 위원으로 추가 선임되었고, 8월과 10월에는 이억 · 현은 · 이종일 · 유필근이 해임되었다.

활동은 1907년 9월 16일에 제1회 회의를 개최한 이래 23회의 회의를 열었는데, 그 최종 회의는 1909년 12월 27일 에 있었다. 그동안 위원장은 10회에 걸쳐 모두 14개항의 문제를 제출하였고, 이에 대한 토론과 의결을 거쳐 1909년 12월 28일자로 최종적인 보고서를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보고서는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과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위원 8명의 연구안으로 꾸며졌는데, 정부는 이에 대하여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문연구의정안」은 세상에 공포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국문연구의정안」은 국문연구소 위원들의 협동적 노력의 결정으로서, 개화기에 있어서의 국문연구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국문연구의정안」은 앞서 토의에 붙였던 14개항의 문제를 10개항으로 요약하여 정리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① 국문의 연원과 자체(字體) 및 발음의 연혁, ② 초성 중 ㆁ,ㆆ, △, ◇, ㅱ, ㅸ, ㆄ, ㅹ 여덟 자의 부용(復用) 당부(當否). ③ 초성의 ㄲ, ㄸ, ㅃ, ㅆ, ㅉ, ㆅ 여섯 자 병서(竝書)서법(書法) 일정(一定), ④ 중성 중 ‘ · ’자 폐지와 ‘=’자 창제의 당부, ⑤ 종성의 ㄷ, ㅅ 두 자의 용법 및 ㅈ, ㅊ, ㅋ, ㅌ, ㅍ, ㅎ 여섯 자도 종성에 통용 당부. ⑥ 자모(字母)의 7음과 청탁(淸濁)의 구별 여하(如何), ⑦ 주2의 용부(用否) 및 국어음의 고저법, ⑧ 자모의 음독(音讀) 일정(一定), ⑨ 자순(字順)과 행순(行順)의 일정, ⑩ 철자법 등이었다.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문자체계와 표기법의 통일안이라고 할 수 있다. ‘ · ’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이 의정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국문연구소의 문제토의과정에서 위원들이 제출한 연구안 등의 등사물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육당문고(六堂文庫)에 보관되어 있고, 그 최종보고서의 모든 서류는 일본 동경대학 중앙도서관의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 당시 간행된 『황성신문』 · 『대한매일신보』 등의 보도도 참고가 된다.

참고문헌

『조선문자급어학사』(김윤경, 조선기념도서출판관, 1938)
『개화기의 국문연구』(이기문, 일조각, 1970)
「구한국시대의 국문연구회를 회고하면서」(이능화, 『신생』 2권 9호, 1929)
「신정국문에 관한 연구」(김민수, 『아세아연구』 6권 1호,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3)
『朝鮮語學史』(小倉進平, 東京 刀江書院, 1920)
주석
주1

다수의 의견에 따라 합의하여 결정하기를 요구함. 우리말샘

주2

훈민정음에서, 중세 국어의 성조(聲調)를 중국의 전통적 술어인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을 그대로 적용하여 네 종류로 나눈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 글자 왼쪽 곁에 방점을 찍어 표시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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