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립협회(共立協會)는 미주 한인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1908년 11월 먼저 하와이 합성협회(合成協)와 함께 대표자를 선출하고 합동 발기문을 발표하면서 통합을 선언하였다. 두 단체가 통합하여 1909년 2월 1일 미주 한인 사회의 통일 기관으로 국민회(國民會)가 창립되었고, 이후 기존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변경되었다.
국민회는 한국과 한국민을 대표하는 단체라는 인식 속에서 통일 연합론에 입각한 통일 연합 기관을 완성하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선포하였다. 일본의 강제 병합이 가시화되어 가는 가운데 국민회는 대한제국 정부와 황실을 부정하면서 국권 회복의 주체로 ‘민족’을 내세웠다.
1909년 3월 24일 발표한 「국민회 장정(國民會 章程)」에서는 단체의 목적이 국권 회복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한편, 미국의 연방제도를 본받아 헌법에 의한 대의정체(代議政體)를 채용하며 미주, 하와이에 지방총회를 설립해 각각 자치를 허락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국민회의 목적을 교육과 실업을 증진하고 자유와 평등을 제창하여 동포의 영예를 증진하며 조국의 독립을 획득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국민회는 이전의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를 각각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변경하였지만 기존의 자치권을 그대로 인정하고 ‘국민회’의 이름만 붙인 일종의 협의체 조직에 불과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통일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앙총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국민회는 1910년 2월 10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통합한 후, 같은 해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칭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국민회의 「국민회 장정」을 계승하는 한편, 중앙총회를 건립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하여 1911년 3월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총회장 최정익(崔正益)과 부회장 한재명(韓在明을 선출하였다.
1914년 11월에는 안창호(安昌浩)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으로, 박용만(朴容萬)이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이후 안창호는 지방총회가 아닌 중앙총회 중심으로 조직을 일원화하고 개선하려 하였으나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신한민보(新韓民報)』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공립협회의 기관지 『공립신보(共立新報)』를 계승하여 발행한 기관지이다. 따라서 1909년 2월 10일 발행한 『신한민보』 창간호의 발행호수는 1호가 아니라 119호이다. 『공립신보』가 118호까지 발행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