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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金爀)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남만주의 3, 1만세운동, 청산리전투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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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남만주의 3, 1만세운동, 청산리전투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명은 김학소(金學韶). 호는 오석(吾石, 烏石). 경기도 용인 출신.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용인학원(龍仁學院)을 거쳐 1892년 3월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1897년 4월에 무관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보병참위로 임관되었으며, 그 뒤 육군참령(陸軍參領)에 승진되었다.
1907년 8월 한국군이 해산을 당하자 일제와 싸울 것을 결심하고 고향인 용인에 돌아가서 청년들을 규합,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한 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남만주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 망명하였다.
같은 해 8월 김호(金虎) 등과 함께 수백 명의 애국청년들을 모아 흥업단(興業團)을 조직, 단장에 김호를 추대하고 김혁은 부단장으로서 항일투쟁에 전력하였다. 이듬해 9월경에는 봉천성 안도현(安圖縣) 삼인방(三人坊)에서 홍범도(洪範圖)·지청천(池靑天) 등 수백 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산리전투를 겪은 다음 1921년 1월에 영안현(寧安縣) 밀산(密山)에서 서일(徐一)·홍범도·지청천·김좌진(金佐鎭) 등과 합세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용군·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대한독립단·광복단 등 만주의 10개 독립군단체를 통합,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이때 군사부장에 선임되어 노령(露領)에서 항전하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었다.
1925년 3월 15일 영안에서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를 열어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신민부가 목릉현(穆綾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자, 교장을 겸임하여 500여 명의 사관생을 양성, 독립운동 요원을 안정적으로 배출하였다.
그 뒤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합작하고 중한연합군(中韓聯合軍)을 편성, 항전하였다. 1927년 2월중동선(中東線)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총회 개최중 일본과 만주 경찰 합동수색대의 기습을 받고 항전하다, 박경순(朴敬淳)·유정근(兪政根)·이춘섭(李春燮) 등 1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하얼빈 일본영사관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이듬해 3월 20일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해 4월 4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최종 판결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하였다. 그 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가 1936년 8월 25일 가출옥하여 고향 용인에서 죽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1997)

  •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광복출판사,1983)

  • 『독립군의 전투』(신재홍,민족문화협회,1980)

  • 『한국현대사연구』(이현희,동화문화사,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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