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촌락 ()

안동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
촌락
개념
동성동본의 씨족성원들이 한 마을에 집단거주하여, 그 동성집단의 조직과 기능이 촌락 전체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촌락. 동족부락.
이칭
이칭
동족부락
정의
동성동본의 씨족성원들이 한 마을에 집단거주하여, 그 동성집단의 조직과 기능이 촌락 전체에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촌락. 동족부락.
형성과정

동성촌락의 역사적 형성은 후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초기에 걸쳐 성립된 각 지방의 토성(土姓)의 성격에서 그 선행적인 양상을 찾을 수 있다. 토성이란 지연적(地緣的) 촌락공동체로서의 ‘토(土)’와 혈연적(血緣的) 씨족공동체로서의 ‘성(姓)’이라는 복합적 뜻을 가진다.

이들은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 무렵까지 한국사의 지배세력을 산출한 각지의 혈연적·지연적 사회집단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나 ≪경상도지리지≫ 등에 토성·망성(亡姓)·내성(來姓)·속성(續姓)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망성은 없어진 토성, 내성은 다른 곳에서 전입한 성, 속성은 원래 있다가 없어진 토성을 이어받은 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각지의 토성집단은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기인하여 그 토착성을 확산하고, 분관(分貫)과 분파(分派)작용을 일으켜 각지에서 그 거주범위를 넓혀갔다.

≪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각지의 성씨는 원래 그 지역의 토성집단의 성격을 계승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토성은 지연적 유대가 공고한 씨족적 집단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 이후 군현 구획의 개편과 향(鄕)·소(所)·부곡(部曲)의 소멸, 북방민족이나 왜구의 침략에 의한 토착민들의 대규모 이동, 중앙과 지방의 관인계층의 교유, 특히 조선왕조의 성립에 의한 지배세력의 변동 등으로 15세기 후반 이후부터는 그것의 토착적 성격은 점차 줄어들게 되고 본관(本貫)이 더욱 중시되었다.

이와 같이 원래 토성이 가졌던 지연적 응집성은 본관만을 남기고 해체되었다 하더라도, 후세에까지 어느 정도 그 지연성을 지속했기 때문에 그 혈연적 유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동성촌락의 수가 1930년대만 하더라도 전국촌락의 약 반 정도에 달하고, 그 성립연대도 300년에서 500년 이상의 것이 그 태반을 차지하였다. 또 주로 옛 토성의 토착지와 그 인접지역에 그들의 동성촌락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은 원래 토성집단이 가지고 있었던 지연성에서 계승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 종법사상(宗法思想)과 씨족조직(氏族組織)의 광범한 보급은 16세기와 17세기에 다수의 동성촌락이 출현하고 있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즉, 그 이전까지는 토성집단이 한 지방에 모여 살아도 명확한 씨족조직을 구성하지 못한 데 반하여, 이 시기부터는 종법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문중재산인 족전(族田)을 형성하며, 종중조직을 체계화하여 동성촌락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명문사족들은 그 관직에서 얻은 공신전(功臣田) 등의 사전(賜田)이나 직전(職田)이 있는 지역에 분가, 분촌하여 파(派)를 이루고 동성촌락을 형성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시조나 중시조(中始祖)에 이와 같은 현관(顯官)이 배출되었다 하더라도 원래의 재지세력권(在地勢力圈)으로부터 먼 곳에 분촌하여 분파를 이루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황(李滉)의 문중인 진보 이씨(眞寶李氏:眞城李氏)의 사례를 통해 그 분파·분촌의 과정과 양상을 살펴보면, 아래의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의 분파·분촌인 동성촌락은 시조 이석(李碩)의 땅인 청송군 진보를 제외하고 거의 전부가 청송군에 인접하여 있는 안동군 내에 확산되어 있다. 이황의 자손들이 “진성 이씨 상계파(上溪派)의 분파·분촌은 대종가를 중심으로 10리 사방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듯이, 원래의 재지세력권으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분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성촌락의 확산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 신분구조의 급격한 변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 후기 신분구조의 변동상은 ≪대구호구장적 大邱戶口帳籍≫의 분석을 통하여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신분구조의 측면에서 볼 때 전체 가구 중에서 사족이 점하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격증하여 전 호수(戶數)의 7할을 넘는다. 이것은 조선 후기 촌락사회의 사족사회화 현상을 상징하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이를 통하여 미루어보면 사족, 즉 양반출계를 자인하고 혈연적으로 결속하여 지연적으로 밀집 거주하는 동성촌락이나 동성집단도 증가의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혈연관계

동성촌락의 기본구조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혈연관계이다. 우리 나라의 가족이나 씨족에서는 부계혈연을 통한 남자 개인의 자격이 여타의 어떤 조건보다 우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가계(家系)의 계승방법이나 혼인제도·입양제도(入養制度)·상속제도·대소가(大小家) 관계·분가(分家) 방식과 상호 연관되는 문제이다.

우리 나라 동성촌락의 주요한 구성집단인 씨족은 혈연적 족집단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면서도, 거주적 족집단이라 할 만한 거주의 응집성을 함께 갖는 절충적 족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우리 나라의 씨족집단은 거주의 요인보다 혈연의 요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편 부계씨족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성집단은 여러 파(또는 宗派·支派·分派)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함께 하는 동고조8촌(同高祖八寸)의 당내친(堂內親)은 가장 좁은 범위의 혈연적 족집단으로 파나 문중에 비하여 더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다. 파는 씨족조직 전체에서 당내와 문중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된다.

한 씨족 안에는 경우에 따라서 다르나 대개 20 내지 50개의 파가 있다. 파는 그 파시조(派始祖)의 생존중이나 사후에 곧바로 분파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자손이 직계선조 가운데서 관작이나 학문에 뛰어난 사람을 세워서 그가 씨족성원들에 의하여 인정되고, 또 그 거주지역에서도 유림(儒林)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그 명성을 인정하였을 때, 그를 파시조·중시조(中始祖) 또는 입향조(入鄕祖)로 삼아 새로운 파를 형성할 수 있다.

대종가계(大宗家系) 이외의 제사에 참석하는 최대의 범위가 이 파이며, 문중에 비하여 협동집단으로 결속력이 강한 것이 보통이다. 이와 같은 내적 구조를 갖는 한국의 씨족은 대개 일정한 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한다. 그 범위는 여러 마을을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지역이 되는 경우가 많다.

씨족의 공식적 조직인 문중조직도 하나의 마을을 단위로 독자적으로 조직, 운영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넓은 지역을 지리적 거점으로 삼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문중조직 자체를 촌락 내의 정치적 조직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력이 강한 문중조직이 형성되어 있을 때, 그 문중에 속한 성원들이 다른 성씨들에 대해서 촌락 내 또는 지역 내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동성촌락 내의 주요한 사회관계는 같은 동성성원들간의 관계, 동성원과 타동성원과의 관계, 동성원과 비동성원과의 관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같은 동성원들간의 관계는 주로 대소가 관계나 항렬(行列)과 장유(長幼)의 질서에 의하여 규정되고 조절된다.

역사가 오래된 동성촌락의 경우에는 입향조의 후손들이 몇 개의 파로 나누어지는 분파현상이 발생하여 마을 내에서 각각의 파가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같은 파라 해도 친족원간의 친등관계(親等關係)가 멀기 때문에 실질적인 친밀한 관계를 갖는 집단은 다수의 당내집단일 경우가 많다. 이들 당내집단의 자주성이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동성원 내의 이러한 대립과 분열은 동성집단의 통합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대소가 관계나 항렬·장유의 질서에 의하여 조절된다.

특히 마을 내의 타동성집단 또는 비동성원과의 대립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파를 초월하여 전체 동성원들이 단합하게 된다.

하나의 마을 내에 두 개 이상의 동성집단이 지배적인 성씨를 이룰 경우, 이들 동성집단간에는 예외없이 대립과 경쟁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과거의 신분과 경제능력을 배경으로 하여 위세경쟁을 하며 마을 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하는 것이 보통이다.

뚜렷한 동성집단을 이루지 못하는 비동성원과 동성집단간의 관계는 단순히 친족관계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신분적·경제적 관계까지 중첩된 형태로 나타난다. 저명한 동성촌락일수록 주도적 동성집단은 과거에 신분적으로 양반계층에 속하고 경제적으로 지주층인 경우가 많다.

반면 비동성원은 상민 또는 노비로서 동성집단에 신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지주­소작관계에 매여 있기도 하다. 이럴 경우 촌락의 정치적 권력은 신분적·경제적으로 우세한 동성집단이 장악하고 있다.

동성집단의 신분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지 않은 경우에는, 비동성원과의 관계가 위와 같이 철저한 지배­예속의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마을 내에서 다수의 성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동성원에 비하여 동성집단의 발언권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신분제도의 폐지, 문중조직의 약화, 경제적 계층구조의 변화가 초래되면서 동성촌락 내에서의 사회관계·권력관계가 과거와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즉, 동성원과 비동성원의 관계를 양반과 상민의 신분적 관계로 인식하는 의식은 혼인의 경우 등에만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실제적인 사회관계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또한 경제적으로 성공한 비동성원들이 마을 내의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연관계

동성촌락의 주민은 그 조상의 연고지 근처에 촌락을 형성하고, 또 될 수 있으면 그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사는 대등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타성의 씨족성원과 통혼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 나라 동성촌락들의 거주집단이라는 성격을 보여주는 특성이다.

적어도 파 단위의 동성집단은 지연적 응집성을 보이고 있다. 씨족 전체를 보더라도 몇몇의 이른바 대성(大姓)을 제외하면, 동성촌락과 동성집단의 분포와 그들의 선조의 묘지 분포, 그리고 동성성원의 지역적 통혼권은 종파·종가가 위치하는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거의 동심원적 확산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자녀균분상속제(衆子女均分相續制)를 실시한 조선 초기까지는 혼인에 의해서 얻은 처가편의 토지나 조상의 관직이나 공로로 점유한 사전(賜田)·직전(職田) 등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을 수가 있어서 그곳에 자손이 모여 성립된 동성촌락의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는 위에서 말한 동성집단의 거주지역을 벗어나는 예에 해당된다. 앞의 지도에서 진보 이씨가 시조의 땅인 청송군 진보에서 처음 이주한 안동군 내에서 분파, 분촌해 간 과정을 보았다. 그런데 각 분파가 처음 분가하여 동성촌락의 기틀을 잡을 당시 그 곳에 자리잡게 된 까닭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이씨 문중의 경우는 초기에는 직전·공신전이 있어 그 부근에 자리잡게 되었으나, 후대 온혜파(溫惠派) 형성 이후의 분파·분촌에는 이러한 이유와는 관계없이 촌락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자연촌락은 종가와 도산서원(陶山書院), 그리고 중시조 이황의 묘소로부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성촌락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정착한 마을은 서원이나 묘소에 속한 문중 공유의 농토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진성 이씨 상계파에 속하는 각 분파의 동성촌락도 모두 종가와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있다.

한편 풍산유씨(豐山柳氏)의 동성촌락들과 조상의 묘소의 분포, 씨족성원의 통혼권이 경상북도의 북부일대에 밀집상을 보이고 있는 사례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씨족집단의 문화적 영향권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분가한 자손이 동성촌락들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성촌락의 분포권과 그 성원들의 통혼권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동성촌락의 지연적 관계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동성촌락이 단일 성씨로 이루어졌을 경우 동성불취(同姓不娶)의 원칙 때문에 촌락 내의 혼인은 전무하며, 씨족성원이 거주하는 동심원적 지역의 범위 내에 있는 마을 또는 대등한 신분의 타성에 의하여 형성된 인접한 동성촌락과 혼인관계를 누적시켜 왔다.

이와 같이 동성집단의 거주권과 통혼권이 중복됨으로 인해서 그 성원들의 부편·모편·처편의 친족의 거주지역과도 어느 정도 겹쳐지게 된다.

씨족성원은 그 선조와 연고가 있는 일정지역 내에 분가, 분촌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혼인에 있어서도 씨족외혼·계급내혼의 규제에 저촉되지 않는 한 가급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같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다른 씨족성원과 혼인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친족관계도 공통의 지역에 겹쳐지는 것이다.

이 경우에 가격(家格)이나 문중의 사회적 지위는 주로 조선시대 선조의 관직, 즉 사회적 지위와 유학의 학파를 뜻하는 학통(學統)에 의하여 결정된다. 신분이 대등한 동성촌락 상호간에 혼인관계를 누적시켜 온 이러한 문중의 연대관계를 혼반(婚班)이라고 한다.

경제적 기반

동성조직은 경제적 기반 없이 성립될 수 없다. 경제적 기반은 동성집단이 가지는 공유재산의 내용, 큰집이 가지는 재산의 상속방법, 분가 때의 재산 분여방식, 그리고 지손(支孫)들이 종가를 돕는 보종(補宗)의 문제 등으로 집약해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대소가(大小家) 관계와 분산(分産)에 관하여 보면, 우리 나라에서 재산상속은 대체로 중자녀균분에서 중남자균분(衆男子均分)으로, 다시 장남우대 불균등상속으로 변천하였다.

가계계승의 내용으로는, 무형적인 것으로 가장권(家長權, 戶主權)과 선조제사권 그리고 택호(宅號) 등이 있고, 유형재산으로 토지·가옥·산림·문물 등이 있다. 고려 초 12세기경까지의 상속제도에서는 사전(賜田)을 장남이 상속하고 노비는 자녀가 균분상속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토지사점화(土地私占化)가 진행되면 고려 말기 이후 16세기경까지는 완전한 중자녀균분상속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후 출가외인으로 간주된 딸은 상속에서 배제되었으며, 점차 남자만의 균분상속으로부터 장남우대 불균등상속으로 변화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차남은 태어나면서부터 분가하게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가의 방식에는 동항(同行)의 질서와 장유의 서열, 그리고 상호부조라고 하는 호혜적 관례가 있을 뿐이다.

이는 가계계승자나 분가자를 선정하여 결정하고 단자상속(單子相續)을 하는 일본이나, 또 중남자균분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중국의 상속제도·분가제도와는 판이한 방식이다.

자녀균분적 상속의 전통과 중남자(衆男子)의 생득적인 분가는 필연적으로 큰집의 재산을 영세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가산(家産)의 영세화에서 동성조직을 지탱하고 큰집·종가의 지위를 유지하는 경제적 안정장치가 동성조직의 공유재산과 보종(補宗)이다. 문중의 공유재산으로는 선조제사와 조업보수(祖業保守)를 목적으로 설정된 종토(宗土)·위토(位土)·종산(宗山)·문중산(門中山) 등의 논밭과 산림이 주된 것이다.

조선시대까지는 노비도 공유재산에 포함되어 있었다. 8·15광복 후 경제적으로 부흥한 일부 농촌에서는 동성조직도 활발하게 소생되고 있으나, 공유재산 경영에 실패하거나, 1948년 이후 시행된 농지개혁에 의해서 공유재산이 격감된 동성조직은 쇠잔하고 미약해졌다고 지적되고 있다.

저명한 동성촌락이 가졌던 방대한 공유재산은 그 권위를 지탱하여 온 기반으로 마을 안의 타성은 물론이고 인근의 비동성 주민들에게까지 그 권위를 인정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 과거의 신분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된 오늘날, 동성촌락의 공유농지의 격감은 그대로 동성집단의 약화 내지 해체를 촉구하는 요인이 되었다.

동성촌락의 공유재산 경영에서는 종가나 동성조직의 유력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 재산들이 그들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되는 것은 아니다. 동성촌락의 종가들의 경제적 배경으로 보종의 문제는 뺄 수 없는 요건이다.

종가가 경제적으로 궁지에 처했을 때 씨족성원들이 협력하여 수호하는 일을 보종이라 하는데, 현금을 추렴하는 문전(門錢)의 방법도 있고, 동성조직의 공유재산을 매각하여 충당하는 수도 있다.

또 동성촌락 출신의 부유한 성원이 출생 마을의 종가를 경제적으로 보호하여 원격조정하는 경우도 근래에 보이고 있다. 보종이라고 하는 결속력이 없었다면 현존하는 저명한 동성조직이나 그 종가들은 현재와는 다른 양상으로 성쇠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된 것처럼 동성촌락의 개념을 요약하면 첫째, 부계혈연의 외혼집단으로서 부계의 남자와 그 배우자만으로 구성되는 동성성원 중심으로 형성된 촌락이다. 둘째, 성립과정에 있어서 신라 말기부터 형성된 토성에 맥을 잇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말기까지 주로 사회의 지배층에 속해 있으면서 중앙정부의 관료층과 연관을 가지는 양반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형성된 씨족집단의 취거촌락이다. 셋째, 성원은 생득적 자격을 가진 한 집의 상속자나 분가한 중남자로 이루어지고 획득적 자격은 인정되지 않는다.

넷째, 거주의 지연성을 보여 일정지역의 한계 안에 복수의 촌락들을 형성하여 상호교섭을 가진다. 파(派) 단위의 거주범위는 상당히 넓고 동성조직 전체로는 전국적 확산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다섯째 공유재산인 농토와 산림은 중자녀균분상속으로 인한 문중재산의 영세화로부터 동성조직을 지키는 안전장치 구실을 하여 그 조직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 있다. 여섯째 혈연성과 지연성을 아울러 지니는 절충적 족집단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동족부락의 생활구조연구』(김택규, 대구청구대학교 출판부,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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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양국의 이른바 ‘동족부락’에 관한 비교시고」(김택규, 『한일관계연구소기요』 10·11, 영남대학교 한일관계연구소, 1981)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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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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