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우 묘 출토 유물 ( )

목차
관련 정보
박광우 묘 출토 유물 / 청동령과 백자소호
박광우 묘 출토 유물 / 청동령과 백자소호
공예
유물
문화재
조선 중기의 문신 박광우(朴光佑)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
목차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박광우(朴光佑)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
내용

1982년 충청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박광우의 묘는 원래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 오산리에 있었다. 묘의 위치가 해방 이후 육군 작전지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후손들의 출입이 불가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묘 관리와 성묘를 제때에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부득이 1967년 2월 28일에 현재 위치인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로 이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관곽(棺槨)과 청동령(靑銅鈴), 백자소호(白磁小壺)가 발견되었다.

관곽은 내외 이중관으로, 향나무로 만들어졌다. 관은 시신에 가까이 닿는 장구(葬具)로서 벽(椑)이라고도 한다. 곽은 외관 또는 대관으로 불리우며, 관과 1촌 5푼 정도 간격을 둔다. 박광우의 관곽은 위가 넓은 반면 아래는 좁은 상광하협(上廣下狹)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관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칠성판도 있다.

관의 크기는 250.5㎝×69.6㎝이며, 곽의 크기는 280㎝×99.5㎝이다. 관곽은 거의 손상되지 않고 원래의 형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보관 장소에 온습도 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탓인지, 관의 뚜껑 한쪽 부분에 균에 의해서 부스러기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시신의 발 밑에서 청동령 7개가 발견되었다. 겉면에는 장식과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으며, 둥근 모양으로 가운데가 약간 좌우로 벌어져 있다. 높이는 2.3㎝이며, 중경(中徑)은 2.6㎝이다.

백자소호는 부장품으로서 명기(明器)로 보이는데,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에 기술된 와무(瓦甒) 형태와 동일해 보인다. 구연부(口緣部)는 짧으며, 중간이 볼록하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안쪽으로 좁아진다. 장식과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지만, 연봉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덮개[冪]가 있다.

숭인사(崇仁祠)에 관곽 진품과 청동령 · 백자소호 복제품이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청동령 · 백자소호 진품은 박재훈(朴在勳, 박광우의 15世孫)이 현재 소장 · 관리하고 있다. 숭인사는 1990년 12월 30일에 준공된 박광우의 사당이며, 청주 박광우 묘소(충청북도 기념물, 1987년 지정)는 이 곳에서 위로 100여m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1999년 10월 9일 성역화 사업이 완공되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정절공재박선생광우사적비문(貞節公齋朴先生光佑事蹟碑文)」
『재박공광우유적성역화사업준공록(齋朴公光佑遺跡聖域化事業竣工錄)』(상주박씨찬성공파종중, 1999)
관련 미디어 (2)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