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업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병조좌랑, 정언, 함양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응휴(應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8년(선조 1)
사망 연도
미상
본관
고령(高靈)
출생지
충청남도 충주
주요 관직
병조좌랑|정언|함양군수
정의
조선 중기에, 병조좌랑, 정언, 함양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응휴(應休). 충주 출신. 아버지는 박무(朴懋)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4년(선조 2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7년 주서(注書)가 되고 사관(史官)·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정언(正言)이 되어 납속인(納粟人) 이춘란(李春蘭)에게 상직으로 태천현감(泰川縣監)을 제수하자 그의 무식함을 들어 취소할 것을 주장하고, 또 간리(奸吏)들의 모리행위를 지적, 그 폐해를 제거할 것을 간(諫)하였다.

이어서 헌납(獻納)이 되어 회령부(會寧府)는 육진의 중심이 되는 곳이므로 야인(野人)들을 능히 통활 할 수 있는 당상관으로 수령을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경상도관찰사에 이시발(李時發)이 거론되자 그가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민심을 잃고 원한을 많이 샀던 점을 들어 부적함을 주장하였다.

박승업은 동인(東人)이 남·북인으로 갈라질 때 북인으로, 다시 북인이 대·소북으로 분열할 때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 등과 함께 소북이 되었는데, 1600년 경기도사(京畿都事)로 재직 중 당론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하여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1607년 함양군수로 복직된 뒤 지평(持平)·장령(掌令)·겸필선(兼弼善) 등을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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