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는 ‘사람의 지배’ 대신 ‘법의 지배’를 통하여 통치가 행하여지는 주의이다. 절대군주의 자의적 전횡을 억제하기 위해 법치주의가 등장했지만, 통치가 법에 의거하기만 하면 된다는 형식적 개념은 히틀러 나치스 정권에서 보듯 ‘권력자의 자의’가 법률의 탈을 쓰고 합법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있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국가권력을 헌법의 실질적 법가치에 구속시키는 실질적 법치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보호할 의무를 지며 모든 법률이 헌법의 법가치를 실현할 때에만 법률로서의 효력을 갖게 한 것이다.
법치주의는 영국에서의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에서 코크경(Coke,E.)이 제임스 1세와 항쟁할 때 “국왕이라 할지라도 신과 법 밑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여 영국의 헌정상의 원칙으로 확정되었다.
이것은 절대군주의 권력을 견제하여 그의 자의(恣意)로 통치하는 것을 막고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에 의해서만 통치하게 하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지배’의 원리는 왕권에 대한 ‘법의 우위’를 의미하며, 그것은 영국에서는 국회의 ‘입법권의 우위’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법치주의의 원칙에 따라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법률로서는 1215년의 마그나카르타(Magna Charta Libertatum)를 비롯하여, 1628년의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 1689년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 등이 있으며, 그러한 법률들은 모두 국왕의 절대권력을 제한함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의 법치주의는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확고한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의회주의와 정치적 자유의 행사를 통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헌정상의 대원칙으로 되어 있다.
이 ‘법의 지배’의 원리는 독일에서는 ‘법치국가(Rechtsstaat)’ 이론으로 발전하여, 국가는 법으로 구성된 단체이며(법과 국가의 동일성의 이론), 국가의 모든 행정은 법률에 따라서 행하여져야 하고(행정의 합법률성의 원칙), 기본권의 제한은 법률에 의해서만 가능하고(기본권 제한의 법률유보), 그리고 행정명령은 법률에 근거해서만 만들어지고 그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에 있어서만 효력을 가질 수 있다는 원칙(법률우위의 원칙)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법치국가는 당시의 절대군주국가나 경찰국가에 대립하여 등장한 것이었지만, 19세기의 법실증주의사상과 결부되어 완전히 형식적 개념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통치가 법에 의하기만 하면 어떠한 국가도, 즉 권력국가나 경찰국가도 법치국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치주의 원래의 의미, 즉 권력자의 자의를 법으로 통제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법치주의가 형식적 법치국가사상에 의하여 이와 같이 변질된 것은 입법권의 우위가 배제되고 법내용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입법권이 형식상 국회에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 국회가 권력분립의 원칙에 따르는 견제적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포괄적인 위임입법으로 그 견제적 기능을 포기하거나 할 때에는 지배자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을 법에 구속시켜 이를 통제한다는 의미의 ‘법의 지배’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형식에서만 법의 지배일 뿐이고 실제로는 사람의 지배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적 법치국가에서는 지배자의 자의가 법률의 탈을 쓰고 무엇이든지 합법적으로 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법률에 의한 합법적인 범죄까지 저지를 수 있었다. 그 전형적인 예가 히틀러에 의한 나치스정권의 지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경험을 겪고 나서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형식적 법치주의는 크게 비난받게 되고 실질적 법치주의가 새로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실질적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을 단순히 형식적인 법률에 구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헌법의 실질적인 법 가치에 구속시키는 원리로 나타났다. 즉, 모든 국가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게 되고, 모든 법률은 이 헌법의 최고 법 가치를 실현할 때에만 법률로서의 효력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법(正法)에 따라 지배하는 법치주의를 확립시킨 것이다. 그 내용은 국가권력의 자의를 배제하는 모든 제도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첫째, 헌법재판제도이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수호자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법률에 대하여 위헌판결을 내리며 그 법률의 효력을 무효화시켜버린다. 이러한 헌법재판에 의한 규범통제의 기능은 악법의 존재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봉해버린다.
이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사권은 지배자의 자의가 법률화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입법자의 자의도 배제할 수 있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모든 국가활동에 대한 합헌성 여부를 감시하는 기능을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실질적 법치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제도이다.
둘째, 행정의 합법률성(合法律性)의 원칙이다. 국가의 모든 행정은 법률에 따라 행하여지며 행정처분이나 명령은 법률에 저촉하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법률에 따라 행정을 통제하는 법치행정의 원칙을 확립하게 한다.
결국 법률이 헌법에 의하여 구속되는 것과 같이 명령은 법률에 의하여 구속된다. 이와 같이 해서 법치국가는 헌법의 근본가치를 실현하는 법질서의 통제로서 파악되며 지배자의 자의에 의한 통치가능성을 배제한다.
셋째, 권력분립의 원칙이다. 법치주의는 권력분립을 전제한다. 권력이 분립되어 있지 않으면 지배자의 자의를 막을 길이 없다. 국가권력의 전부가 통치자에게 주어져 있을 때 지배자의 자의를 견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하여는 권력을 분립시켜 상호견제와 상호감시를 하도록 제도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러한 국가구성원리를 바탕으로 법치주의는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넷째, 국가행위에 대한 사법적인 구제이다. 법치국가에서는 모든 국가행위에 대하여 사법적 구제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예컨대, 잘못된 국가행위로 손해를 입은 사람은 법에 따라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으며, 또 공공의 필요성으로 국민의 재산권이 침해될 때에는 법에 따라 손실보상을 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형사사건에 있어서 피고인이 무죄판결을 받으면 법에 따라 형사보상을 받을 수 있다.
다섯째,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다.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는 원칙은 국가의 형벌권을 제한함으로써 그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법치국가의 형법은 범죄와 형벌을 법률로써 정함으로써 국가형벌권의 발동한계를 그어놓은 국가구속 규범이다. 지배자는 형벌권을 마음대로 발동할 수 없고 오직 법률에 근거하여서만, 그리고 법률에 정한 처벌범위 내에서만 그것을 행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형사절차에 있어서도 법률에 따르지 않고는 체포 · 구금 · 수색 · 신문 · 재판을 할 수 없다. 형사법에 있어서의 이러한 요구가 국가권력의 남용을 방지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치주의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법치주의의 내용을 이루는 모든 원리들은 한결같이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원칙들로써 일관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들은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는 수단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복지국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국가권력은 시민의 모든 생활분야에 걸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적극적으로 마련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것을 ‘사회적 법치국가’라고 하는데, 여기서 법이 하는 구실은 국가로 하여금 인간의 생존권을 보장할 의무를 지게 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는 법은 국가로 하여금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으로 통제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존조건을 확보하여 보다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살펴주는 구실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법치국가에서는 ‘국가에로의 자유’가 문제되며, 그것은 인간의 생존적 기본권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자유적 기본권의 보장이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생존적 기본권의 보장은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법치국가가 사회적 법치국가의 기능을 맡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자유적 법치국가의 기능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법치국가의 작용은 자유의 침해에 관계되어 있는 권력작용이 아니라 자유의 신장에 관계되어 있는 비권력적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에 따라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본래의 법치주의의 기능은 오늘날에도 아무런 변화를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법치주의가 도입된 것은 8 · 15광복 이후의 일이다. 즉, 광복 후 민주공화국 헌법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법치주의의 원리가 받아들여졌다. 일제강점기에는 법으로 통치를 받았지만 그것은 법치주의가 아니었다.
그때의 법은 탄압과 착취를 위한 식민지 통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결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하는 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법치주의는 우리가 자주독립국가로서 민주공화국 헌법을 가지게 된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 거기에는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권력을 제한하는 모든 법원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헌법」에 나타나 있는 법치주의의 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본적 인권의 보장이다.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언명하며, 제11조 이하에는 인간의 모든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적 인권은 국가의 안전보장 ·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반드시 법률에 의해서만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둘째, 권력분립의 원칙이다. 우리 「헌법」은 삼권분립에 의한 상호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권력의 남용을 막는 법치주의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놓고 있다. 즉, 입법권은 국회에, 행정권은 정부에, 사법권은 법원에 각각 속하여 있다.
셋째, 위헌법령심사제도이다. 「헌법」 제107조는 “①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법원은 헌법재판소에 제청하여 그 심판에 의하여 재판한다. ② 명령 · 규칙 또는 처분이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되는 여부가 재판에 전제가 된 경우에는 대법원은 이를 최종적으로 심사할 권한을 가진다.”고 언명하고 있다.
이것은 위헌법령을 사법기관이 심사하여 그 효력을 배제하는 규범통제의 수단으로서 법치주의는 이 기능을 상실하면 완전히 형식화되어 사이비 법치주의로 전락되고 만다. 왜냐하면, 악법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넷째, 국가행위에 의한 권리침해에 대한 구제제도이다. 「헌법」 제29조에는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이를 위해 「국가배상법」이 있다.
또 「헌법」 제23조에는 “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 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이를 위해 「토지수용법」 · 「징발법(徵發法)」 등이 있다.
또 「헌법」 제28조는 “형사피의자 또는 형사피고인으로서 구금되었던 자가 법률이 정하는 불기소처분을 받거나 무죄판결을 받은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에 정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이를 위하여 「형사보상법」이 있다.
다섯째,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다. 「헌법」 제12조에는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 · 구금 · 압수 · 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 · 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또 제13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행위시의 법률에 의하여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여 소급입법금지와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은 형벌권의 행사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기 위한 것들이다. 그 밖에 우리 「헌법」은 사회적 법치국가의 이념에 따라 생존적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즉,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 근로의 권리 등을 가진다.
우리나라 헌법상의 법치주의의 원리는 아직 민주헌정의 역사가 짧아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 원리는 국가생활에 있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들이므로 확고부동한 통치원리로 정착되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