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동 3·1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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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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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 때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내용

벽동읍에서는 3·1운동 전에 이미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직접 연락의 줄이 닿아 있었다.

이승훈은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이 무르익어갈 무렵, 산악지대 동포들도 이 민족적 거사에 참여시키기 위하여 의주군 월화면 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벽동에 밀파하였다. 또한, 천도교 측에도 의주의 최석련(崔碩連)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있었다.

벽동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 벽동교구에서 3월 10일의 제1세교조 순도(殉道) 기념일을 기하여 수백명이 기념식을 거행한 뒤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거리로 나오자, 주민들과 기독교인이 이에 가세하여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전개한 뒤 자진 해산하였다.

또 30일 200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출동으로 해산하였고, 31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군중 300여명이 독립만세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역시 일본군의 출동으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4월 1일 밤 11시경, 1,000여 명의 군중이 천도교인들이 쏘아올린 폭죽(爆竹) 신호에 따라 사방에서 일시에 읍내로 몰려들어 실력행사를 하려 하자, 일본수비대와 헌병대가 황급히 출동, 발포하여 1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25명이 구금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 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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