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

유교
개념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이나 논리적 판단체계를 가리키는 철학용어. 세계관.
정의
인간들이 생활하면서 지니게 되는 세계관이나 논리적 판단체계를 가리키는 철학용어. 세계관.
개설

포괄하는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에 공간적·시간적·범주적인 한정어를 덧붙여 구체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국’사상은 ‘한국’이라는 공간 안에서 생겨난 사상이라는 뜻과 한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해온 사상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또한 한국의 철학·종교·정치·사회·경제 등 제범주를 포괄하는 사상이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철학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이후 서양철학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전래되기 이전까지 철학과 종교는 엄격히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사상의 흐름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한국사상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무속신앙이다. 이 신앙은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한국의 고유한 독자성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런 무속신앙의 터전 위에 외래사상인 유교·불교·도교 등이 유입되었는데 서기전 4세기경에 유교, 2세기 말에는 도교, 4세기 초에는 불교가 중국을 거쳐 전래되었다. 고대에 전래된 외국사상들은 오랜 시대에 걸쳐 한국적 풍토에 맞게 변용, 발전되어 한국문화와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외래사상이 토착화되어 한국의 전통사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유교의 구실이 두드러졌고, 후기에 이를수록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고려 때에는 불교가 국교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신유학(新儒學)으로서의 성리학이 관학(官學)으로서 통치 이념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도교는 통치원리로서 체계화되기보다는 무속신앙과 함께 민간신앙으로서 일반 민중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전통사상들은 대체로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한민족의 의식 구조 속에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유학 내의 새로운 움직임과 천주교의 도입이었다. 이런 새로운 동향은 근대 지향의 판도를 마련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봉건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에는 개신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개신교는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 도입을 필연적으로 야기 시켰으며,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재편성에 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서구문화의 대규모 유입은 조선사회의 전부분에 걸쳐 충격적인 효과를 발생시켰는데, 당시 사상계에서는 과거의 전통사상을 새롭게 종합, 전개시키려는 신종교운동이 형성되게 되었다. 신종교운동은 여러 갈래의 다양한 성격을 띠며 발전되어갔으나 당시 제국주의적인 침략에 대항해 강한 민족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에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도 전통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수많은 현대사상이 서로 자신의 설득력을 주장하고 있는 개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에서는 위에서 개관된 각각의 사상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무속신앙

한국의 무속신앙은 시베리아 일원에 걸쳐 퍼져있는 샤머니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런 공통적인 기반 위에 한국의 독자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한민족의 신화적 사유를 이루고 원초적 잠재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신앙은 현재도 민간의 무속 중에 상당 부분 존속되고 있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도교·불교 및 민간신앙 등과 접합, 동화되어 본래의 내용과 특성이 많이 변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자화되어 기록된 신화 내용에서 그 본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더 용이할 것이다.

한국의 신화로서 대표적인 것들은 <단군신화>·<고주몽신화>·<박혁거세신화>·<석탈해신화>·<김알지신화>·<김수로왕신화> 등이다.

이 신화들의 내용은 한결같이 고대 한국의 국조(國祖)들의 탄생과 그들에 의한 건국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탄생이 천신(天神)의 강림에 의한 것이며 단군의 고조선 건립시기가 중국의 요(堯)임금과 같은 때였다는 것과 같은 줄거리이다.

이와 같이 중국과 비교하는 시각에서 한민족의 연원을 천신이나 초월적인 기원에 돌림으로써 한민족의 독자적 주체성을 확보하려는 강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신화들은 국조의 탄생과 건국 과정에 주된 초점을 모으게 된 결과 우주의 창조나 신들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거의 표명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은 이 민족의 원초적 사고가 현세 치중과 인간 중심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원래 샤머니즘에서는 무당이 굿을 통해 초월적 세계와 인간적 세계를 매개해 길흉화복을 예측하고 병도 고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무당은 신적인 세계와 소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믿어짐으로써 고대사회에서는 제사장의 구실뿐만 아니라 통치권의 행사까지 주관해 제정일치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고대 한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단군’의 명칭은 무당에 해당하는 ‘단골’·‘당굴’의 음역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이사금’·‘거서간’·‘차차웅’이라는 칭호 역시 고대 한국에서는 무당의 의미로도 사용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무당에 의해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지배되던 시기가 있었음을 고려하면, 고대의 무속신앙은 일종의 통치 원리의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무속신앙이 지닌 사상적인 특징은 우선 자연신들을 숭상함으로써 다신론적 성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고대의 한국인들은 천신(天神) 이외에도 태양신과 풍신·우신·운신 등을 믿었다. 다만 시대가 내려올수록 자연신 중에서 천신이 가장 중요시되었는데,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등의 제의들과 단군신화에서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특정 부족의 생존과 번영을 일정한 동물과 관련지어 숭상하는 토템사상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 박혁거세신화의 말, 김알지신화의 닭 등이 그 예이다. 또한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사고가 무속신앙에 작용하고 있었는데, 수목숭배나 거석숭배는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이 장례 때 큰 새의 날개를 사용하거나 죽은 사람의 물건을 무덤에 넣어주는 부장(副葬), 아내나 하인을 함께 묻는 순장(殉葬)을 행하였던 것은 모두 인간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다.

무속신앙을 기초로 한 제정일치의 시대는 고대 삼한(三韓)이 자리잡을 무렵에 끝나고 제정 분화의 현상이 일어났다. 정치 권력을 장악한 부족장으로서의 ‘거수(渠帥)’와 제사장인 ‘천군’이 따로 분립한다.

‘천군’으로 불리던 무당은 소도(蘇塗)라는 특정 지역을 관할하고 방울과 북을 매단 큰 나무를 세워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그 소도에 범죄자가 도망쳐 들어가더라도 부족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무속신앙에는 원래 신성 관념과 부정 관념(不淨觀念)이 있는데, 부정 관념을 바탕으로 금기의 개념이 나타난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금기로부터 원초적인 윤리와 법의 개념이 대두되게 된다. 예를 들면 효의 원천이 되는 조상숭배라든가 팔조법(八條法)과 같은 불문율 등이 그러한 것이다.

조상숭배는 조상의 영혼에 대한 외경·공포에 바탕을 두고 생겨난 것으로 나중에 유교의 덕목을 받아들여 발전시키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팔조법은 현재 3조목만이 전해지고 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상해자는 곡물로 상환해야 하며 도적은 도둑질했던 집의 노비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조선에 감옥이 있었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이런 법규가 실제로 상당히 구속력을 발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주목되어야 할 점은 무속신앙이 시조신앙(始祖信仰)과 연결되어 한민족의 민족적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커다란 구실을 행하였다는 점이다. 사실 한민족의 시조신앙인 단군신앙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것은 항상 민족의 위기가 닥치는 시기와 일치하였다. 위기 때마다 부각되어 민족의 단합에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무속신앙이 비록 역사의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각광받지는 못하였지만, 역사의 이면에서 민족문화의 발전에 숨은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음을 살펴볼 때 한국사상사에서 무속신앙이 차지하는 자리는 좀더 높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유교사상

중국으로부터 유교가 유입된 것은 서기전 12세기경이라는 입장이 있다. 그 이유는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한국에 들어와 홍범구주(洪範九疇)와 정전법(井田法) 등 유교적인 통치술을 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유교의 연원을 기자에 두는 이런 견해는 과거 한국의 유학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왜냐하면 공자 이전에 벌써 한국의 유교는 중국보다 더 발달해 있었다는 주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의 많은 유학자들은 한국을 유교의 종주국이라고 믿었으며 그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의 입국은 확실한 증거가 없을 뿐 아니라 공자를 도외시한 유교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는 오늘날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대체로 합의되어 있는 유교의 전래시기는 서기전 4,3세기인데, 그 이유는 이 무렵 한국의 지명에 한자의 사용이 본격화되고 지식인들로 보이는 중국인들[避秦人]의 유입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기전 1세기경까지 유교가 수용되는 과정에 대해 적극적인 징표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에서 ≪유기 留記≫라는 사서를 쓰는 등 유교의 영향이 엿보이게 되었다.

3세기에는 ≪논어≫와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래했으며, 4세기 후반에는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의 건립을 계기로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유교의 초기 수용은 주로 ≪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 등의 오경과 ≪사기≫·≪한서≫·≪후한서≫ 등의 삼사(三史), 그리고 ≪논어≫·≪효경≫·≪문선 文選≫ 등을 통한 것이었다.

이런 기반 위에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다 같이 나름의 국사를 찬술하고 유교적인 예속화(禮俗化)를 도모하는 한편,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때 유교적 교육에 의해 충·효의 사상이 생활화하게 되었으며 이런 체제의 강화책은 당시의 부족연맹적 국가 형태에서 절실하게 요청되던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더욱 적극화되어 6세기경에 이르면 유교적인 정치 이념이 민본(民本)·위민(爲民)의 정신 아래 덕과 예로써 통치하는 것임을 설총(薛聰) 같은 학자는 물론 진흥왕과 같은 통치자까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유교 이념의 확대와 충실한 실현을 위한 계속된 의지는 마침내 왕조나 사회 체제의 변혁에 대해 합리화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9세기 신라 말기의 유학자들이 당시의 골품제의 모순에 저항하는 분위기를 형성해 왕건의 고려 건국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그 예이다.

10세기 후반의 한국 유교는 관료제를 뒷받침해주면서 중세사회의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최승로(崔承老)와 김심언(金審言)과 같은 유학자들은 지방 관제의 확충과 군도(君道)·신술(臣術)·이도(吏道)를 실현시키려 애썼으며, 과거제의 시행을 확립했고 관리의 부정부패 방지를 위해 감찰제의 시행을 이루었다.

통치의 기술 및 관리로서의 출세도구로 간주되던 11,12세기의 고려 유교는 국학 및 사학기관의 교육과 궁내대신의 강회(講會)를 통해 높은 수준으로 연구, 발전되었다. 그러나 12세기 후반부터 관료적인 한계와 폐단을 드러내어 사치스런 귀족문화의 풍조만을 조장하는 데 그칠 뿐 더 이상 강력한 사회사상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시대사상을 요청하게 되었고 성리학이 신유학으로서 그 역할을 행하게 되었다.

성리학은 11세기 말 12세기 초부터 사신들의 교류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13세기 말엽 주희(朱熹)의 학설이 전해지는데, 이후 한국의 유학계는 정주계(程朱系)의 독무대가 되어 육왕계(陸王系) 심학(心學)의 세력은 미약한 상태에 머무르고 만다.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통치 원리로 채택되어 조선이 멸망하는 20세기 초까지 도교·불교·무속신앙을 배격하면서 그 자체의 기본적 논리를 성리학자와 관리들을 통해 실현시켜나가려고 애썼다.

특히 15,16세기에는 성리학적 이상주의에 철저한 일군의 학자들, 즉 사림파(士林派)가 대거 집권세력층에 가담하게 되어 성리학의 사회사상적 기능이 적극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학의 이론적인 탐구도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이상 정치를 지향한 제반 개혁은 전자를 대표하며,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같은 인성 연구(人性硏究)는 후자를 대표한다.

인성의 연구란 사단칠정에 대한 이기론적 해석을 의미한다. 사단과 칠정을 각각 ‘이(理)의 발(發)’, ‘기(氣)의 발(發)’ 혹은 더 복잡한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 등에 대한 새로운 본체론적 탐구(本體論的探求)로서 당시의 시대배경과 연결시켜 보면 군왕의 덕치(德治)·예치(禮治)의 근거와 유교 윤리의 근거를 밝히는 작업이다.

이황은 8년의 세월에 걸쳐 기대승(奇大升)과의 논쟁을 통해 연구를 심화시켰으며, 이 문제는 이이 이후에도 거의 2세기 동안 계속 논의의 초점이 되어 한국 성리학의 연구 수준은 중국보다 높이 고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제를 둘러싸고 학설의 대립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학파의 성립이 이로 인해 형성되어 ‘퇴계학파’·‘율곡학파’ 혹은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인성 연구는 18세기에 일어난 ‘인성·물성(物性)의 동이(同異)에 관한 논쟁’과 함께 한국의 성리학적 이론 탐구의 대표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원래 유교의 정치는 예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성리학을 통치 원리로 채택한 조선시대에는 예의 교육과 그 보급·실천이 정책적으로 매우 강화되었다. 15세기 이후 ≪가례 家禮≫·≪삼강행실록≫·≪소학≫ 등의 활발한 간행과 배포가 그 좋은 예이다.

더구나 내면적인 수행을 철저히 행하는 불교를 배척하고 그 대행의 구실까지 해야 했던 관계로 한국의 성리학은 심성 수양에 기초한 예의 실천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2세기의 기간을 거치는 동안 17,18세기에는 예의절대화 풍조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16세기의 인성에 대한 탐구도 예의 근거를 찾고자 하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욱이 17세기에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 그 안정이 시급히 요청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를 절대화하는 사고와 행동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예설(禮說)의 수집·정리·세목화의 작업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일반 지식인들의 일상 생활은 물론 관리들의 당쟁까지도 예의 실천론을 중심적인 문제로 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성리학이 지닌 명분론적 사고의 산물로서 나타난 것인데, 한국의 경우는 그 정도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강했으므로 특색으로 꼽히고 있다.

예를 절대시하는 사고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형식주의적인 사고이다. 그런 까닭에 17,18세기 성리학자들의 현실감각은 상당히 둔감하여 격동하는 사회에 대해 융통성있는 자세를 보이지 못하고 고식적인 태도만을 견지하였다.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은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며 이런 성리학 풍토에 비판을 가하며 대두한 것이 실학(實學)인 것이다. 더욱이 이질적인 서구문화에 대해 양반 지배층의 의식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서구문화는 도덕을 갖추지 못한 야만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서구의 강력한 무력을 목도한 대부분의 성리학자들은 소극적인 쇄국만을 고집하였다.

이런 입장은 일본의 제국주의 세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대체로 척외·수구를 통한 주권수호의 방향으로 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일제의 침략 후 의병 전쟁에서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불교사상

사서(史書)의 기록에만 의하면, 불교가 한국에 처음 전래된 것은 소수림왕 2년인 372년이다. 중국의 승려인 순도(順道)가 처음으로 고구려의 왕실에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에 불교가 유입되었다는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해동고승전≫에는 지둔(支遁)이라는 중국 승려에게 고구려의 한 승려가 편지를 보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사서에 기록된 전래 연대는 어디까지나 국가차원의 공식적인 전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불교의 공식적인 전래는 그 뒤 백제·신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진다.

승려들이 공식 사신의 자격으로 왕실에 불교를 전하는 형태를 취하면서 초기의 한국불교는 왕실의 종교로서 출발한다. 이는 불교가 일종의 왕권수호적 기능을 수행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의 불교가 무속신앙과 결부되어 있던 부족 단위의 연맹체적 국가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상당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불교는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 강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진다. 불교의 전래나 공인된 때를 전후해 제도의 개혁과 율령의 반포가 증가하는 한편 무속신앙의 세력들로부터 저항이 있었던 사실들은 이런 관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체제 변화를 일으킴에 있어서 불교가 끼친 영향력은 유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평가된다. 불교사상 자체가 유교와 비교할 때 정치·사회사상적 측면보다는 윤회설에 기초한 개인 수행과 극락왕생의 측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불교는 국가 체제의 수립보다는 불교적 윤리관과 또 다른 종교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더욱 이바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6,7세기에 이르러 매우 현저하였다. 백제에서는 겸익(謙益) 등의 노력으로 율종(律宗)의 연구가 크게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원광(圓光)·자장(慈藏) 등이 점찰보(占察寶)·세속오계·포살의식(布薩儀式) 등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교적 도덕의 실천을 고취시켰다. 또한 원효 등은 불교 대중화의 방법으로 아미타불 중심의 정토종신앙을 크게 일으켰다.

불교가 국교로 대접받던 고려조에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화되어 계속적으로 개최되던 팔관회·연등회 등은 바로 불교적인 도덕의 연마와 기복신앙(祈福信仰)이 표출된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다 들어왔지만 중국·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승불교는 별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대승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6세기 초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7세기의 원효에 이르러 절정에 다다랐다. 그의 <일심설 一心說>과 <화쟁론 和諍論>은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특징적인 입장으로, 불교내 모든 이론들을 유기적으로 종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통합적인 방법론적 태도는 이후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계승되어 한국 불교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11세기 의천(義天)과 12세기 후반 지눌(知訥)의 ‘선교합일(禪敎合一)’사상이라든가,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불교 배척에 맞서 불교 옹호책으로 주장된 14,15세기의 기화(己和)와 16세기의 휴정(休靜)의 <삼교유사론 三敎類似論> 혹은 <삼교회통론 三敎會通論> 등은 그런 특징들을 입증해주는 예들이다.

우리 나라 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민족국가의 유지에 크게 이바지하면서 민족문화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런 성격은 불교의 이상국가인 정토(淨土)가 바로 신라에서 실현될 수 있다는 ‘불국토설(佛國土說)’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우리의 불교가 전래 초기부터 왕실과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불교가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호왕(護王)은 곧 호국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불교의 이런 성격은 왕권의 강화 뿐만 아니라 고려조의 성립과도 같이 왕권의 교체도 가져오게 하였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삼국통일의 경우를 비롯해 소극적으로는 외침에 대한 승군의 수많은 항전을 불러일으켰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휴정·유정(惟政)·처영(處英)·각성(覺性) 등이 주도한 승군의 전투야말로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탑·사찰·불상 등의 국보급 불교예술품 중의 많은 수가 국가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팔만대장경≫도 고려 때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불교가 호국정신을 통하여 민족국가의 존속과 민족문화의 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민족의식을 확고히 하는 데 불교가 상당한 구실을 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불교 본래의 무국적적인 보편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우리 불교가 민족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일정한 몫을 하여왔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불교가 우리 나라의 전통사상으로서 간주되어 높이 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도교사상

도교가 언제 우리 나라에 유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통치의 수단으로 도교를 도입한 것은 고구려 보장왕 2년인 643년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오두미교(五斗米敎)가 고구려의 민간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7세기 전반기보다 훨씬 앞서 유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도가인 노장사상(老莊思想)도 4세기 막고해(莫古解)장군이 자기의 시에 인용할 정도이므로 매우 일찍 전래되었다고 판단된다. 노장사상은 신라의 태학(太學)에서 교과목의 하나로 채택되었던 이래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문·무의 관리를 포함해 지식인의 교양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노장사상은 조선조의 몇몇 유학자들에 의해 매우 깊이 연구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되기도 하였다. 이이의 ≪순언 醇言≫, 박세당(朴世堂)의 ≪도덕경주해 道德經註解≫·≪남화경주해 南華經註解≫, 한원진(韓元震)의 ≪장자변해 莊子辨解≫, 서명응(徐命膺)의 ≪도덕경지귀 道德經指歸≫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휴정의 ≪도가귀감 道家龜鑑≫은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도교와의 일치점을 찾아본 노장 연구서이다.

도교는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현세적 성향을 보이는 점이라든가 산천과 일월성신 등 자연신을 숭상하는 점에서 무속신앙과 유사한 측면이 많아 예로부터 서로 동화, 화합하였다.

민간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풍수도참사상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타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찍이 고구려에서 도교를 도입했을 때도 도사(道士)들이 풍수설에 의거해 평양성 등을 증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도교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가장 왕성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풍수설의 영향은 지대해 국내의 도로·관청건물·사찰·가옥·묘지 그리고 관복·승복에 이르기까지 풍수서인 ≪해동비록 海東祕錄≫에 의해 규정되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정감록 鄭鑑錄≫신앙도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서의 왕조의 변전(變轉)에 대한 주장으로 풍수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한편으로 제도화된 도교의 성립도 이루어져 도관(道觀)의 설립과 도교의 제의인 초제(醮祭)는 이미 고구려 때부터 행해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천존(天尊)’·‘태일(太一)’·‘태을(太乙)’의 신앙이 뚜렷하게 부각되었다. 특히, 고려 때에는 도교가 불교와 적극적으로 화합하여 개인과 국가의 양재초복(攘災招福)을 기원하는 구실을 수행하였다.

개인의 수련을 강조했던 도교가 출병(出兵)이나 가뭄극복을 위한 초제를 지내게 되어 불교와 함께 호국적인 성격을 띠면서 군왕과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복원궁(福源宮)과 소격전(昭格殿) 등의 도관이 새롭게 세워진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며 이곳에서 여러 가지 국가적 행사가 군왕의 참석 하에 행해졌다.

그러나 조선조의 성리학시대가 전개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와 같은 성리학자들의 강력한 배척으로 소격전은 철폐되었고, 왕실의 보호를 받던 도교도 뒷받침을 잃게 되어 점차 무속과 같은 민간신앙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조에서 도교가 성리학에 의해 배척받으면서 피지배층인 민중의 장생과 초복(招福)을 위한 기능을 행사하게 되었던 까닭에 지배층의 사상적 성향과 매우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배층의 사상적 성향이 사대적이고 현란한 데 비해 도교는 보다 소박하고 주체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규원사화 揆園史話≫와 같은 도교적 역사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실학사상

여기에서 말하는 실학(實學)이란 17세기 초에서 19세기 말 사이에 일어난 새로운 유학운동을 가리킨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들도 자신의 학문을 ‘실학’이라 칭했으므로 때로 혼란이 야기되는데 어떤 학자들은 전기 실학과 후기 실학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실학’의 명칭을 사용했더라도 그 내용과 용법은 매우 다르다.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를 비교의 대상으로 하여 노장과 불교사상의 출세간적(出世間的) 은둔주의를 비실제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삼강오륜적 사회윤리 사상과 왕도적 통치술을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해 스스로 실학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후기 실학의 경우는 바로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보다 실질적인 학문을 추구해야겠다는 의지를 표방하고 나온 것이다.

원래 성리학을 통치 원리로 삼았던 조선조는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그 자체내의 모순과 폐단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농촌에서는 부농과 빈농의 차이가 격심하게 되어 농토를 잃은 농민의 수가 증가해갔고, 도시에서도 고리대금업 등의 팽창으로 상인 가운데 빈부의 차이가 심해졌다.

지배층 내에서도 권좌는 한정되어 있는 데 비해 양반의 수효는 급증해 권력 투쟁이 갈수록 치열해졌고 집권층에서 탈락한 양반이 증대되었다. 여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차례 외침은 당시 사회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당시는 각 방면에 걸쳐 전면적인 개혁이 요청되는 상황이었으나 지배층 및 성리학자들은 개인의 수양이나 사단칠정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탐구 또는 예설(禮說)의 집성과 세목화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주자학의 토대 위에서 명분주의와 형식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었던 이런 사회적·사상적 분위기에 대해 일부의 학자들은 성리학의 비실제적 풍토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결과 실학이라는 학문적 흐름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實事求是)’ 등의 정신을 역설하면서 그 실천을 위해 원시 유학의 현실적 태도 회복과 고증의 방법 등을 강조하였다.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점이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실학의 방법론적 특색 중 하나이다.

이러한 성격은 이수광(李睟光)·유형원(柳馨遠)·박세당(朴世堂)·양득중(梁得中)·이익(李瀷)·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정약용(丁若鏞)·김정희(金正喜)·최한기(崔漢綺) 등의 업적에서 현저하게 확인된다.

이들 실학자들은 간혹 단독으로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상당수가 일정한 학맥(學脈)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입장을 형성시켰다.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의 세 가지 구호는 각각 세 가지 주요유파의 경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경세치용학파는 이익을 대종으로 하면서 토지제도나 행정 기구와 같은 제도 개혁에 치중하였다. 이용후생학파는 박지원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 기구의 발전 등 기술면의 혁신을 강조하였다. 실사구시학파는 경서·금석문·전고(典故)의 고증을 위주로 하고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루었다.

원래 실학은 기본 정신 중의 하나가 ‘박학정신(博學精神)’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백과사전적인 저술을 많이 산출했고 매우 복합적인 학문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사장학(詞章學)·고증학·경세학·의리학 등 다양한 분과학을 포괄하는 복합체의 구조를 띠면서도 실학이 하나의 통일적 학문 체계로 간주되는 까닭은 분과학적 분야들이 모두 성리학의 세계를 공소(空疎)한 것으로 여기고 성리학을 극복해 실제성 추구의 정신을 관철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세계가 전근대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면 실학의 세계는 근대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각 분과학적 특성들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첫째, 고증의 정신은 추상적 관념의 유희를 배격하고 사실과의 일치여부를 중시하는 입장이므로 근대 과학적 태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둘째, 박지원의 ≪양반전≫·≪허생전≫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실학이 양반의 가식과 횡포를 폭로, 비판하면서 신분 차대와 직종 차별의 타파를 외쳤던 만큼 근대적인 인권과 평등 의식의 싹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 소수 양반 귀족의 사유지로 전락해가던 농토를 국가 공유 혹은 농민 소유로 환원시켜 농민을 도탄에서 구해내려는 일련의 전제 개혁론이나 정약용 등에 의해 환기된 맹자류의 혁명론은 물론, 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치자의 선출론까지 언급하고 있는 실학의 주장들은 모두 근대 민주 의식에 접근하는 사상들이다.

넷째, 실질 내용보다 명분이나 형식을 중요시하던 성리학자들의 사고 방식을 비판하고 경험 위주의 인식론과 공리주의적 사회, 윤리관을 주장한 실학사상은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을 제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실학의 근대 지향적 사고 방식은 부분적·표층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적·심층적인 차원에서 마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는 한국에서의 근대적 사회로의 전환이 이미 자주적으로 준비되어나갔음을 입증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실학이 한국사상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천주교사상

근대적인 사상적 조류로서 실학 이외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천주교와 동학사상이다. 두 가지 사상이 모두 새로운 종교사상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천주교가 이질적 서양 문화권에서 들어온 외래종교 사상인 데 비해, 동학은 새롭게 전통을 해석하며 자생적으로 등장한 신종교 사상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다.

천주교사상이 처음 한국에 알려진 것은 17세기 초기의 일이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天主實義≫가 1603년 중국에서 간행된 이후 사신들에 의해 전래되어 이수광·허균(許筠)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중기까지도 신앙의 대상은 아니었다. 이익과 그 문하의 안정복(安鼎福)·신후담(愼後聃) 등은 천주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을 가한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18세기 말엽에 이르게 되자 상황은 바뀌어 종교적인 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들이기도 한 권철신(權哲身)·권일신(權日身)·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천주교사상을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으로 내면화시키게 되었다. 특히 이승훈은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예수회의 세례를 받았으며, 1784년 귀국 후 조선천주교회까지 창설하였다.

선교사의 포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천주교신앙을 수용해 교회를 조직, 전파했다는 사실은 천주교회사에 유례가 없었던 일로 한국 천주교의 현저한 특색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유학자들의 비판과 관리들의 정책적 박해와 탄압에 견디어가면서 교세를 확장해나갔다.

천주교와 유교는 신앙체계의 유형이 크게 달랐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가치관의 상위점이 양극적이었기 때문에 상호간의 세계관적 갈등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1785년(정조 9) 천주교는 이미 사교(邪敎)로 규정되어 관계 서적의 수입마저 금지 당했고, 1791년에는 천주교신자인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상(喪)에 신주(神主)를 없애버림으로써 유교적 전례를 무시한 죄로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18세기 말 당시 천주교는 주로 남인계 학자들 중에 많은 신자를 두었기 때문에 남인이 득세할 경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801년(순조 1)의 신유옥사와 1839년(헌종 5)의 기해옥사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신도들의 종교적 열의는 역경 속에서도 계속되었고 외국인 신부들이 밀입국해 들어옴으로써 더욱 고조되어갔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프랑스 신부인 모방(Maubant)·샤스탕(Chastan)·앵베르(Imbert) 등의 입국과 활동이 기억될 만한 것이었다.

1876년 조선이 마침내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천주교에 대한 정책도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1882년에는 척화비가 철거되었고, 1898년에는 공식적으로 선교가 공인되어 천주교사상의 활발한 전파가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큰 교세를 지니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우선 고대 이래로 이어져온 한민족의 경천적 습속을 들 수 있다. 무속이 지배하던 고대부터 상제(上帝)로서의 ‘하느님[天]’을 숭배해온 습속은 새로이 들어온 천주(天主)를 이질적인 것으로 수용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가 전해질 당시 조선사회에서 소외받던 계층이 많았다는 점도 고려될 만하다. 전래 초기의 신자들은 몰락한 남인계 학자, 출세가 한정된 서출(庶出)양반, 중인 계층의 의원, 역관을 비롯하여 사회적 차별 대우를 심하게 받던 부녀자·노비·농민들이었다. 소외 속에 새로운 생활 양식을 희구하던 이들에게 천주교는 하나의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힘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천주교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특히 전통적 가치관으로부터의 일탈을 촉진해 당시 봉건적 여러 요소들을 불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밖에도 서구의 과학·기술에 접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서구화·근대화의 문제가 제기되는 간접적 배경을 이루기도 하였다.

동학사상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사회 구조의 해체기로서 극도의 혼란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홍경래의 난’·‘진주민란’ 등 크고 작은 민란들이 계속해 발생했고, 삼정(三政)의 문란은 농민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으며, 전염병까지 주기적으로 발생해 수십만의 인명을 앗아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질적인 천주교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어갔으며 구미열강의 무장된 선박이 출몰하는 것은 조선사회 전체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서 ‘구세제민(救世濟民)’의 기치 아래 등장한 것이 동학사상이었다.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물의 ‘서학(西學)’과 대결함을 의도하고 있었다. 즉 동학이라는 명칭 아래 무속신앙·불교·유교·도교 등의 요소를 자기 나름으로 포괄함으로써 동양의 전통적 가치관의 통일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 서학과 대결해 위기에 처한 종래의 동양적 전통을 유지하는 동시에 혼란한 현실과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동학에는 여러 종교를 종합하려는 성향과 적극적인 현실 개혁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동학에서 종교의 종합화 경향은 치병을 위한 주문·부적, 그리고 산신제 등의 민간신앙적 요소와 도교적인 양기(養氣)의 방법, 불교적인 인성(人性)의 자각, 유교적인 성경(誠敬)의 태도 등의 강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동학에서 현실개혁의 태도는 후천개벽(後天開闢)·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기치가 혁명의 의지 속에 주장되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동학의 현실개혁 의지가 혁명의 차원에까지 이르렀던 것은 전봉준(全琫準)에 의해 주도된 ‘갑오농민전쟁’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동학의 사상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천주(侍天主)’ 사상으로서 이를 실현하기 위해 성(誠)·경(敬)·신(信)의 태도가 매우 강조되고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과 연결되면서 인간 자체의 존중 사상[人尊思想]까지 높여지게 된다.

근대 교조인 최시형(崔時亨)에 이르러 동학사상도 더욱 구체화되어 인존 정신이 부각되는데, “사람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事人如天).”, “인간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은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주장된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인의 평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많은 학자들은 동학이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종교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한민족의 자주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공로가 동학사상에 내재되어 있다.

현대철학의 사조

한국에서 서구의 철학사상에 대해 간접적이나마 인식할 수 있게 된 계기는 천주교의 전래였다. 그 뒤 18,19세기 무렵부터 서구의 철학에 대해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세기 말에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철학을 유학의 관점에서 비판한 저술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철학고변 哲學攷辨≫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20세기 초부터는 근대적 고등 교육기관이 제도화되어 이를 통해 서구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상황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던 시기이므로 사상적 분위기도 민족주의적 정신을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어나갔고, 단군신앙과 무속신앙의 연구도 활발하게 되어 최남선(崔南善)·손진태(孫晋泰)·이능화(李能和)의 업적이 서구사상의 연구와 병행해 등장하였다.

1933년 철학연구회가 조직된 뒤 1960년대까지 출간된 서구철학 관계 서적들은 대부분 서구철학을 개략적으로 소개하는 개설서의 수준이었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는 서구철학의 도입기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서구철학의 도입기가 이렇게 길어진 까닭은 장기간의 일제치하와 그 이후의 혼란과 악조건이 연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철학의 경향도 일본인들의 영향을 받아 주로 칸트·헤겔 등 독일철학에 경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상은(李相殷)·박희성(朴希聖)·박종홍(朴鍾鴻)·손명현(孫明鉉) 등은 각각 맹자·생명·부정(否定)·자유의지 등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란 후의 분위기를 타고 조가경(曺街京) 등이 실존철학의 연구를 크게 유행시켰고,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김태길(金泰吉) 등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을 널리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70년대 이후로는 김준섭(金俊燮)·이초식(李初植)·이명현(李明賢) 등이 과학철학을 소개했고, 김여수(金麗壽)·소흥렬(蘇興烈) 등은 언어철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다.

이와 같이 서구의 철학을 보급, 전개시키는 노력과 병행해서 동양의 전통철학을 현대적인 방법론 아래 연구하려는 노력이 1960년대 이상은·김경탁(金敬琢)·김용배(金龍培) 등에 의해 행해졌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 유승국(柳承國)·김충렬(金忠烈)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또한 한국의 전통철학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고 활발하게 활동해온 연구의 경향은 오늘날의 한국 철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되어야 할 측면으로 1950년대의 현상윤(玄相允)·권상로(權相老) 등에 의한 한국유교와 한국불교의 정리, 1960년대 이을호(李乙浩)의 다산경학연구(茶山經學硏究), 이기영(李箕永)의 원효 연구, 1970년대 윤사순(尹絲淳)·유정동(柳正東)의 퇴계철학 연구 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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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상』(윤사순·고익진 편, 열음사, 1984)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85)
『한국종교사상사 』Ⅱ(금장태·류동식, 연세대학교출판부, 1986)
『한국실학사상연구』(금장태, 집문당, 1987)
『한국철학사』 상·중·하(한국철학회 편, 동명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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