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3·1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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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19년 3·1운동 때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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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3·1운동 때 경상남도 사천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내용

1919년 3월 18일의 진주의거에 참여하였던 황순주(黃順柱)·박기현(朴基玄)·김종철(金鍾喆) 등 3명은 강달영(姜達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얻어와서, 3월 21일의 사천공립보통학교졸업식이 끝나는 시간에 의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윤조(李允祚)가 졸업식 전에 태극기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만세시위는 예정보다 앞당겨 전개되었다.

이 때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주동인물 3명이 구금되었다. 그 뒤 4월 14일중선포(中宣浦)의 도로공사노역을 마치고 귀가하던 사천면 두량리의 유승갑(柳承甲)과 손계묵(孫季默) 등이 도로공사 인부 100여 명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인부들이 일제히 호응, 만세시위대는 사천읍으로 향하였다.

이 때 급거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하여 주동자가 잡히고 많은 사람이 부상하였다. 한편, 삼천포에서는 3월 25일박종실(朴琮實)과 김우열(金瑀烈) 등의 주동으로 1,000여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주동인물은 붙잡히고 시위대열은 해산되었다.

이 때 한국인 형사 강일선(姜日善)은 구속된 주동인물들에게 온갖 학대와 횡포를 다하였으며,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26일 다시 봉기하였다.

그 밖에 곤양면 송전리에서는 3월 13일, 4월 6일, 4월 19일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서포면 구평리에서도 4월 10일, 4월 16일송찬홍(宋贊洪)과 이주효(李柱孝) 등의 주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집필자
김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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