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평양특별시 중구역 종로동에 있다. 고려시대에는 성제사(聖帝祠), 1725(영조 원년) 평양감사 이정제(李廷濟)의 말에 따라 사액(賜額)을 내려 비로소 숭령전이라 불렀다.
고려 때에는 때때로 왕의 특사가 파견되어 제사를 지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현지의 관원이 제사를 지냈는데, 일반 백성들은 특별한 일이 생겼을 때 가서 소원을 빌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1429년(세종 11)에 처음으로 정전(正殿)과 동서행랑(東西行廊)을 지어 봄 ·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1456년(세조 1)에는 위판(位板)을 바꾸어 “조선시조단군지위(朝鮮始祖檀君之位)”라 하였고, 1460년에는 세자를 데리고 가서 친히 제사지냈다.
1679년(숙종 5)에는 근신(近臣)을 보내 제사지내고, 1697년에는 단군묘시(檀君廟詩)를 지어 바쳤다. 1729년 숭령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참봉 두 사람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으며 승지를 보내 제사지냈다. 1804년(순조 4) 평양부의 큰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1868년(고종 5)에 경복궁의 중건공사가 준공되자 “금년은 단군께서 나라를 세우신 무진년이라, 동녘 땅에 나라의 큰 기틀을 처음으로 세우사 1,000여 년을 다스리셨는바 이제 마침 이 궁전(경복궁)의 낙성됨을 고하여 하늘의 큰 명(命)을 맞이해 드리니 우연한 일이 아니로다.”라는 교시(敎示)를 내리고 평안도관찰사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지내는 세제(歲祭) 때에는 “참으로 하늘이 덕을 내리사 동녘 땅에 큰 기틀을 처음 세우셨도다. 이에 제사를 드리오니 큰 복을 내리소서.”라고 축문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의 기록으로 보아 고려 때에 이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특히 국가적 차원에서 단군을 민족의 시조신으로 봉안하였으며, 숭령전에 모신 단군과 동명왕 중에서도 단군이 중심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숭령전은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와 더불어 단군을 봉안한 곳으로 근래에까지 보존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