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 ()

고대사
인물
후백제의 제2대(재위: 935년~936년) 왕.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후백제
관련 사건
후삼국 통일전쟁
정의
후백제의 제2대(재위: 935년~936년) 왕.
개설

재위 935∼936. 견훤의 장자였으나 넷째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견훤을 유폐시키고 즉위하였다. 그후 고려태조왕건의 대군과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였으나 패배해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멸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은 여러 비빈(妃嬪)들 사이에 왕자를 10여 명이나 두었다. 그 중에서도 넷째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특별히 사랑해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불안을 느낀 신검은 935년(견훤 44) 3월에 능환(能奐)과 두 아우 양검(良劍)·용검(龍劍) 등의 권유를 받아들여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키고, 아우 금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신검은 933년 5월에 고려의 유금필(庾黔弼) 등과 더불어 접전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싸움터에서의 실전 경험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던 견훤은 이듬 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과 애첩 고비(姑比) 등을 데리고 금성(錦城 : 지금의 전라남도 羅州)으로 달아난 뒤 사람을 보내 고려태조를 만나기를 청하였다.

고려태조는 유금필·만세(萬歲) 등에게 바닷길로 가서 위로하고 데려오게 해 후한 예로 대우했으며, 견훤이 자기보다 나이가 10년 위라 해 높여 상보(尙父)를 삼고 남궁(南宮)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양주(楊州)를 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였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고려태조는 4만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진용을 정돈한 다음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후백제의 신검이 대군을 이끌고 북상해 마침내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진했으나 패배해 왕위에 오른 지 1년 반 만에 멸망하였다.

기록에는 능환은 신하로서의 의리를 저버렸다 해 주살(誅殺)당했고, 신검에게는 작(爵)을 내렸으며, 양검과 용검만이 유배되어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으나 신검도 함께 살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 하면 신검이 당시 살아 있다가 뒤에 죽었다면 그 사망 기사가 따로 나올 법한데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후백제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견훤이 고려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려 하자, 신검 등은 고려에 대해 강경책을 견지하려고 한 데서 비롯된 내분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왕조(高麗王朝)의 성립(成立)과 호족연합정권(豪族聯合政權)」(하현강,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7)
「후삼국(後三國)의 성립(成立)」(박한설,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6)
「후백제(後百濟) 금강(金剛)에 관하여」(박한설, 『대구사학』 7·8합집, 1973)
집필자
황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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