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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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문자
개념
삼국시대 신라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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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언어.
내용

현재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부족의 언어로부터 고대 삼국의 하나인 신라의 언어로 발전하고, 신라의 삼국통일로 우리 나라 전체의 언어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신라의 언어는 우리 국어의 근간이 되었다.

신라어는 계통적으로는 한계(韓系)에 속하며, 같은 한계에 속한 백제어와는 매우 가까운 점이 많았으나, 부여계(夫餘系)인 고구려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차이는 이들 언어가 공통조어(共通祖語)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뒤에 생긴 것이다.

신라는 고대 삼국 중에서는 가장 많은 언어자료를 남겼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는 신라어의 참 모습을 자세히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신라어 연구에 이용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 신라의 인명·지명·관명 등의 표기는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내외의 사적(史籍)에서 볼 수 있다. 모두 한자로 표기되었는데, 그 음을 빌려쓴 표기와 새김을 빌려쓴 표기가 아울러 발견되는 예가 적지 않아, 신라어 단어의 음상(音相)과 의미를 재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② 신라시대의 이두(吏讀) 자료는 매우 적다. 따라서 이들은 매우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후대의 이두에도 신라시대의 전통이 담겨 있을 것이나, 그것을 가려내는 정밀한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③ 신라 향가(鄕歌)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14수로서 이 노래들은 향찰(鄕札)로 기록되었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신라어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균여전(均如傳)』에 실려 있는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도 함께 연구될 수 있다.

④ 기타 자료로는 중국의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그곳 말로 성(城)은 ‘건모라(健牟羅)’라고 하고, 읍(邑)의 안쪽은 ‘탁평(啄評)’, 바깥쪽은 ‘읍륵(邑勒)’이라고 하는데 역시 중국말로 군현(郡縣)이다. ……관(冠)은 ‘유자례(遺子禮)’, 속옷[襦]은 ‘위해(尉解)’, 바지[袴]는 ‘가반(柯半)’, 신[靴]은 ‘세(洗)’라 한다(其俗呼城曰健牟羅 其邑在內曰啄評 在外曰邑勒 亦中國之言郡縣也……其冠曰遺子禮 襦曰尉解 袴曰柯半 靴曰洗).”라고 한 것이 발견된다.

이 밖에 간접적인 자료로 한자음(漢字音)과 차용어(借用語)가 있다. 우리 나라의 한자음과 일본어에 들어간 신라어 차용어는 신라어의 음운체계와 어휘를 밝히는 데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여러 가지로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어 주의를 요한다.

신라어의 음운체계에 대해서 지금까지 밝혀진 바는 매우 빈약하여 그 자음체계와 모음체계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말하기 어렵다. 우선 자음체계를 보면 파열음(破裂音)과 파찰음(破擦音)에는 평음(平音)과 유기음(有氣音)의 두 계열은 있었으나, 된소리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추정은 주로 우리 나라 한자음의 연구에서 얻어진 결과이다.

신라어에 된소리 계열이 있었다면 중국어의 전탁음(全濁音) 계열이 이것으로 받아들여졌을 터인데, 우리 나라 한자음에는 된소리로 된 것이 없다. 씨(氏)·쌍(雙)·끽(喫) 등의 된소리는 16세기 이후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중국어의 차청음(次淸音)이 우리 나라 한자음에서 유기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오히려 적고 평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많은 사실을 근거로, 신라어에는 유기음도 없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한자음에 분명히 유기음이 있고, 신라의 지명·인명·관명의 표기에 유기음의 존재를 암시해 주는 듯한 예들이 있어, 신라어에 있어서의 유기음 문제는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한편, 종래에는 중세국어의 유성마찰음 ‘○’, ‘ㅿ’은 신라어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왔으나, 여기에는 다시 생각해야 될 문제들이 있음이 최근의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 이것은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신라어의 모음체계에 중세국어의 7단모음(單母音)즉 ‘·, ㅡ, ㅣ, ㅗ, ㅏ, ㅜ, ㅓ’에 대응되는 모음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몇몇 학자들은 신라어에 ‘ㅣ’가 둘이 있었을 가능성(*i와 *○)을 추구(追究)하여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여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론을 말하기가 이른 처지에 있다.

한편 신라어에도 중세국어와 마찬가지로 모음조화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형태소 내부의 모음조화는 말할 것도 없고, 현존 자료의 제약으로 그 증거가 미약하기는 하나 어간과 어미 사이의 모음조화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신라어의 문법체계는 전체적으로 보아 중세국어의 그것과 대체로 같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격조사는 ‘伊, 是’, 속격조사는 ‘矣, 衣, 叱’, 처격조사는 ‘中, 良中’, 대격조사는 ‘乙, 肸’, 조격조사는 ‘留’ 등으로 표기되었다. 중세국어의 주격조사 ‘이’, 속격조사 ‘ᄋᆡ/의, ㅅ’, 처격조사‘애/에’, 대격조사 ‘ㄹ/을, ᄅᆞᆯ/를’, 조격조사 ‘로’와 일치함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중세국어의 ‘ᄋᆞᆫ/은, ᄂᆞᆫ/는’에 대응되는 후치사는 ‘隱, 焉’으로 표기되었다.

용언의 활용어미에는 다음과 같은 몇 종류가 확인된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의 ‘慕理尸心(그릴 ᄆᆞᅀᆞᆷ)’, ‘行乎尸道尸(녀올 길)’, ‘去隱春(간봄’) 등에 어미 ‘-ㄹ, -ㄴ’ 등이 보이며, 「처용가 處容歌」의 ‘明期月良(ᄇᆞᆰ기 ᄃᆞ래)’에 어미 ‘-이’가 발견되는데, 이들은 고대어에서는 모두 동명사어미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도천수관음가 禱千手觀音歌」의 ‘膝肸古召0xF445’에 ‘0xF445’(며), 「제망매가 祭亡妹歌」의 ‘有阿米次肸伊遣’에 ‘米(매)’와 ‘遣(고)’가 보인다. 이 마지막 어미는 「제망매가」에 ‘古(고)’로 표기되었다. 이들은 모두 부동사(副動詞) 어미로서, 이 밖에도 더 확인할 수 있다.

정동사(定動詞)의 어미로는 ‘齊(제)’가 특이하다. 이것은 이두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정동사 어미로는 평서문(平敍文)의 ‘如(다)’, 의문문의 ‘古(고)’도 사용된 예가 있다. 경어법(敬語法)은 국어 문법의 가장 특이한 현상의 하나인데, 신라어에 이미 중세국어의 그것과 같은 체계가 발달되어 있었다. 경어법은 선어말어미(先語末語尾)에 의존하는 바, 향가에서 존경법(尊敬法)의 ‘賜(시)’, 겸양법(謙讓法)의 ‘白(ᄉᆞᆲ)’이 확인된다. 공손법(恭遜法)은 「헌화가 獻花歌」의 ‘獻乎理音如’에 보인다. 위의 어미들은 각각 중세국어의 ‘-시-’, ‘-○·○·○-’에 대응되는 것이다.

현존 신라어자료를 통하여 상당수의 신라어 단어를 확인할 수가 있다. 향가의 ‘日尸’, ‘道尸’과 같은 표기는 ‘尸’자로 끝 자음을 써줌으로써 이 단어들이 중세국어의 ‘날’, ‘길’에 이어짐을 보여준다.

또 신라 관명의 “波珍飡 或云 海干”(삼국사기 권38)은 신라어에 ‘바ᄃᆞᆯ(海)’이라는 단어가 있었으며 이로부터 변화한 것이 중세국어의 ‘바ᄅᆞᆯ(海)’이었음을 알게 한다.

인명에서는 ‘염촉(厭髑)’에 대하여 “혹은 ‘이차(異次)’ 또는 ‘이처(伊處)’라 하니 이는 우리말의 다름이다. 번역하면 ‘염(厭)’이 된다. ‘촉(髑)’, ‘돈(頓)’, ‘도(道)’, ‘도(覩)’, ‘독(獨)’ 등은 모두 글쓰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쓴 것이니 곧 조사(助辭)이다(厭髑或云異次或云伊處方言之別也譯云厭也髑頓道覩獨等皆隨書者之便乃助辭也).”(삼국유사 권 3)라는 기록을 통하여 신라어에 ‘○-(厭)’이라는 동사 어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의미 변화를 입어 중세국어에 ‘○-(困)’으로 나타난다.

‘居柒夫或云荒宗’(삼국사기 권44), ‘東萊郡本居柒山郡’(삼국사기 권34)에서는 ‘荒, 萊’를 의미하는 단어가 ‘居柒(중세국어 : 거츨-)’이라 발음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신라 지명에는 ‘伐’ 또는 ‘火(블)’을 가진 것이 많은데 이것은 백제 지명의 ‘夫里(부리)’에 대응되는 것으로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국어의 ‘셔ᄫᅳᆯ(서울, 京)’, ‘ᄀᆞᄫᆞᆯ(고을, 郡)’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고유명사의 어원을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신라 말엽에 김대문(金大問)이 어원을 제시한 것이 『삼국사기』에 인용되어 있다.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 등에 관한 것인데, 이로 보아 그때에도 이 단어들의 어원이 문제로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次次雄’은 무(巫), ‘尼師今’은 치리(齒理), ‘麻立’은 궐(橛)을 뜻하는 말로 해석하였는데, 이 모두가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尼師今’의 해석은 인정하기 어렵다. 이 ‘今’(금)은 신라어에서 통치자, 즉 왕을 가리킨 단어인 것이다. 이 ‘금’은 중세국어의 ‘님금’에 남아 있는데, ‘님금’의 본뜻은 ‘주군(主君)’이었다. 이 ‘금’이 고대 일본어에 들어가 kimi(君)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상의 서술에서 알 수 있듯이,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신라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불가능한 처지에 있다. 그러나 현존 자료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날카로운 해석을 꾀한다면 앞으로 신라어에 대해서 좀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신라어라고 하지만, 천년의 기간에 걸친 것이어서 그 초기와 후기의 언어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것을 밝혀서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중세국어와 일치하는 사실들의 확인에 그쳐왔다. 앞으로의 연구는 중세국어와 일치하지 않는 사실들을 밝히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신라어의 특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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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대계Ⅴ-언어문학사-』(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所 편, 1967)
『국어사개설』(이기문, 민중서관, 1961, 개정판 1972)
『고대국어의 연구』(박병채, 고려대학교출판부, 1971)
『향가해독법연구』(김완진, 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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