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충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예조좌랑, 병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직(公直)
사양당(四養堂)
시호
충익(忠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5년(인종 1)
사망 연도
1594년(선조 27)
본관
청송(靑松)
주요 관직
예조좌랑|병조참판|병조판서
관련 사건
동서분당(東西分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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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예조좌랑, 병조참판,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공직(公直), 호는 사양당(四養堂). 사인(舍人) 심순문(沈順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이고,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이다. 어머니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이대(李薱)의 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沈義謙)의 아우이며 인순왕후(仁順王后: 明宗妃)의 동생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2년(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 후 전적으로 등용된 뒤 호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어 수찬(修撰)·직강(直講)을 거쳐 예조좌랑이 되었다.

157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일찍이 형 심의겸에 의해 이조정랑이 되지 못한 동인 김효원(金孝元)이 이조의 중요한 정랑자리가 척신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며 반대하여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동서당쟁은 더욱 심해졌다.

그 뒤 지평(持平)·교리(校理)를 거쳐 1578년에 헌납(獻納)이 되고 이어서 첨정(僉正)·사예(司藝)·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이 되었다. 1582년에 춘천부사, 1584년에 군자시(軍資寺)·내섬시(內贍寺)의 정(正), 1588년에 여주목사·호조참의·병조참지, 1590년에 대사간·형조참의, 이듬해 형조참판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판 겸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가 되어 선조를 호종했고, 세자 호위의 명을 받아 왜적 방비에 힘썼다. 1593년에 호조와 병조의 참판으로 군량미 조달에 공헌했으며, 이듬해 병조판서에 특진되었다. 글씨에도 능했다.

1604년에 좌찬성·대제학에 추증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청림군(靑林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 『사양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북저집(北渚集)』
『상촌집(象村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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