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만춘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고구려 안시성 성주.
이칭
성명
양만춘(梁萬春)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관련 사건
안시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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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양만춘은 삼국시대 고구려 안시성 성주이다. 645년 안시성의 성주로서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국 명대의 웅종곡이 저술한 『당서지전통속연의』에서 등장인물의 하나로 창작되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조선 사회에 전해져 이후의 문헌에 전승되었다.

정의
삼국시대, 고구려 안시성 성주.
가계 및 인적 사항

양만춘(楊萬春)은 645년 고구려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로 당 태종의 공격을 막아 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고려 시기 이전의 각종 자료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삼국사기』의 찬자 김부식은 사론(史論)에서 안시성 성주를 호걸(豪傑)로 평가하였는데, 역사에서 성명(姓名)이 전하지 않아 애석하다고 하였다.

주요 활동

645년 고구려와 당의 전쟁과 관련한 중국 송원(宋元) 대 이전의 각종 자료에서도 역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양만춘이란 이름이 보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자료는 명대(明代)의 웅종곡(熊鍾谷)이 저술한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이다. 이 책은 흔히 『당서연의(唐書演義)』라고 하는데,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간행본은 1553년의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안시성은 좌우친위군관(左右親衛軍官)이었던 6명의 맹장(猛將)이 수비하였는데, 3명은 절노부(絶奴部)의 주수(主帥)였고 3명은 관노부(灌奴部) 주수(主帥)였다고 하였다. 양만춘은 그중에서 절노부의 주수 중 한 명으로, 안시성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당서연의』에 보이는 6명의 장수는 연의소설(演義小說) 속에서 창작된 등장인물이었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장수로 창작된 등장인물이 여럿 보인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명과 교류하며 조선 사회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가장 먼저 양만춘이란 이름이 보이는 것은 윤근수(尹根壽)의 『 월정만필(月汀漫筆)』이었다. 『당서연의』와 『월정만필』 등 초기의 기록에서는 양만춘(梁萬春)으로 나오는데, 이후 양만춘(楊萬春)으로 정착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삼국사기(三國史記)』
『월정만필(月汀漫筆)』

단행본

허태용, 『조선후기 중화론과 역사인식』(아카넷, 2009)

논문

정호섭, 「고구려 안시성의 위치와 안시성주 전승의 추이」(『고구려발해연구』 67, 고구려발해학회, 2020)
남재철,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 고증(1)-성명의 출처 양상 검토를 중심으로」(『동아시아 고대학』 35,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김정배, 「삼국사기 보장왕기 사론에 보이는 ‘유공권 소설’ 문제」(『한국사학보』 26, 고려사학회, 2007)
이승수, 「연행로상의 공간 탐색, 봉황산성-안시성설과 관련하여」(『정신문화연구』 29-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허태용, 「임진왜란의 경험과 고구려사 인식의 강화」(『역사학보』 190, 역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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