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삼 ()

양주삼
양주삼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총리사,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감리교목사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백사당(白沙堂), 하리하라 쥬산[梁原柱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9년(고종 16) 1월 25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안남도 용강
관련 사건
신사참배
내용 요약

양주삼은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총리사,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이자, 감리교목사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79년(고종 16) 1월 25일에 출생하였으며, 사망 시기는 미상이다. 호는 백사당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리하라 쥬산[梁原柱三]이다. 1905년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6년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도록 하고, 본인은 일본의 이세[伊勢]신궁과 신사에 참배하였다. 징병제를 찬성하고,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등의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정의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총리사, 국민총력 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감리교목사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호는 백사당(白沙堂)이고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리하라 쥬산[梁原柱三]이다. 1879년 1월 25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양정섭(梁禎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 감리교회 초기 신학자이자 교회행정가로서 여러 형태의 교회연합운동에 관여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수용 등 친일 반민족행위를 하였으며 해방 후 납북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4년부터 1898년까지 한학을 배웠다. 감리교 선교사 노블(W. A. Noble)과 교유하게 된 후 1899년 상경하여 경성인공양잠전습소(人工養蠶傳習所)에 들어가 1900년 10월 졸업하였다. 헐버트의 소개로 1901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의 남감리교회 계통인 중서(中西)학원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1902년 10월 세례를 받았다.

1905년 6월 중서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에 건너갔다. 1906년 12월부터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1907년 7월 『한인연합교회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08년 12월 『대도』로 개칭하여 월간으로 발간하였다.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 · 전명운(田明雲)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통역을 하였다.

1910년 1월 테네시주 밴더빌트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6월 졸업하였다. 재학중이던 1912년 9월 남감리교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3년 9월 예일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1914년 6월까지 수학하였다.

귀국한 후 1915년 1월 협성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10월 장로목사안수를 받아 경성 자교교회 목사를 담임하였다. 1916년 2월 『신학세계』를 창간하였고 9월 개성 한영서원 부교장을 맡았으며 1918년 11월부터 1923년 9월까지 남감리교선교 100년 기념 사업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경성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2년간 시무하였다.

이후 철원지방과 경성지방 장로사(감리사)를 역임하다 1923년 4월부터 1929년까지 미국남감리회 북간도, 만주, 시베리아 선교사업 총책을 맡았다. 당시 영어를 제일 잘하는 목사로 인정받아 한국교회 대표로 미국남감리회 총회(1922·1924·1926년)와 일본 메소디스트교회 총회(1927년)에 참석하여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1927년 11월 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회장으로 위촉되어 1928년 3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이스라엘 국제선교연맹대회 조선대표단장으로 참석하였다. 1928년 9월 조선남감리교회 전도국 총무를 맡았고 1920년대말부터 조선기독교 창문사(彰文社) 이사를 역임하였다. 1930년 12월 남북감리회가 합동할 때 대표지도자인 기독교조선감리교회 초대 총리사로 선출되어 1938년 10월까지 재임하였다.

1931년 6월 미국 랜돌 메이컨(Randolf-Macon) 대학과 1932년 6월 미국 개렛(Garrett)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경성이화고등여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34년 10월 윤치호 주1기념회 발기인 겸 상무위원을 맡았다.

총리사로 재임하면서 기독교 교육계에 신사참배거부 문제가 일어나자 1936년 1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윤치호(尹致昊) 등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가 국가의 제사의식이라고 설명하자 이를 수용하였다. 그 해 4월 『감리회보』에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을 번역하여 공포하여 감리교회가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중일전쟁 발발직후인 1937년 7월 종교단체 연합시국강연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석하여 강연하였고 8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조선인 유력자 시국강연 강사로 선정되었으며 12월 이화토지경영주식회사 이사로 위촉되었다. 1938년 5월부터 1942년 4월까지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8년 9월 영변 숭덕학교 재단이사를 맡았다. 동년 10월에는 제3회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 공식순서에 ‘애국일 실시’를 넣고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치른 애국일 행사를 총 지휘하여 기독교인으로 ‘충량한 신민’이 되라고 강연하였으며 신도들을 이끌고 총독부에 가서 만세봉창을 하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10월 기독교 조선감리회 만주선교사업 관리자로 취임하였고 12월 감리교 대표로 일본을 방문해 이세[伊勢]신궁과 신사를 참배하였다.

1939년 2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사로 선출되어 재단법인 영변숭덕학원과 송도고등보통학교 이사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 3월 회갑연금을 국방헌금으로 냈고, 5월 일제의 전시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었으며, 10월 내선감리교회합동문제 연합위원회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대표를 맡았다.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이사 겸 은급부장, 연희전문학교 이사로 재선되었다.

1940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과 재단법인 조선중앙기독교청년유지재단 이사를 맡았다. 1941년 1월 조선성서공회 특별위원회 위원장, 3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 겸 기독교조선감리교단본부 규칙개정위원 및 교파합동연락위원을 맡았고, 4월 조선기독교서회 이사장 및 행정총무, 5월 국민총력기독교조선감리교단연맹 이사로 위촉되었다.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및 경기도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월에는 대동민우회가 주최한 ‘미영배격설전대’ 연사로 평양, 진남포, 안주 방면을 맡았고, 3월 감리교회조선선교부유지재단 대표이사, 4월 기독교조선감리교단 경성교구년회 목사대표에 위촉되었고, 6월 『내선일체』에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다는 발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가」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미영격멸간담회’에서 미영폐풍 근절운동을 논의하였고, 11월 9일 『매일신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1944년 12월 14일 『매일신보』에 「전열, 제4년의 각오: 총후는 총무장, 임전무퇴의 결사대」를 투고하여 학병지원을 독려하였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1945년 7월 조선총독부가 개신교 교파를 통폐합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고문에 선임되었다.

해방 후 1948년 3월 부일협력행위로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가 4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9년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될 때 초대 총재를 맡아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8월 납북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Ⅳ-9(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양주삼의 생명과 자연 이해」(서정민, 『한국기독교와 역사』 23, 2005)
「양주삼 목사의 생애와 신학사상」(이덕주,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학술자료실, 2012, www.kchmuseum.org)
주석
주1

드문 나이라는 뜻으로, 일흔 살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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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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