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 ()

여성들의 독립만세 시위
여성들의 독립만세 시위
사회구조
개념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성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벌이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여성운동은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성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벌이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운동이다.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개화기에 남녀의 교육기회균등 요구로부터 비롯되었고, 본격적인 여성운동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여성억압기제를 가부장제 사회구조로 상정하여 여성문제의 원인을 명확히 하였고, 1987년에 21개 여성단체가 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정치투쟁에 나섰다. 호주제가 폐지되는 등 법·제도 개선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고 운동의 주체와 영역도 획기적으로 확대되었다.

키워드
정의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성 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하여 벌이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사회운동.
개설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제반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운동은 가부장제의 철폐와 성차별의 타파, 여성의 성적 자율권과 주체성 확보 등을 중심 과제로 삼고 있다. 여성운동은 여성도 남성과 함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갖기 위한 것으로, 계몽운동기 자유․평등․개혁 사상의 대두와 함께 여성의 권리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초기 사상을 완성한 자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로, 그는 1792년 영국에서 출간된 『여성의 권리 옹호(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en)』에서 여성도 교육․직업․정치 등의 영역에서 남성과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남녀평등사상은 19세기에 이르러 여성의 참정권획득 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현대 여성운동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Le Deuxième sexe)』(1949)의 출간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베티 프리던은 1963년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를 출간하여 여성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하고 남성의 지배에 의존하도록 하는 가정생활을 비판하였다. 그의 이런 활동은 미국과 서유럽 여권운동 단체들의 창립을 영향을 주었고, 현대 여성운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한국여성운동사
해방 이전의 근대 여성운동
개화기

우리나라에서의 여성운동은 개화기에 서구문물의 영향을 받고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여성으로서 자기정체성을 갖고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최초 여성단체로는 여성교육단체인 찬양회와 여우회(女友會)로, 여우회는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순성학교를 설립했고, 최초로 경복궁 앞에서 축첩반대 연좌시위를 하였다. 또한 1907년 ‘국채보상부인회’, ‘ 송죽결사대’, ‘ 혈성단애국부인회’,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도 진행하였다. 이처럼 개화기 여성운동은 여성의 교육권보장과 남녀의 교육기회균등을 요구하는 여성교육운동과 함께 애국운동과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확보하기 위한 여성단체의 이념과 목적에 따라 두 가지 흐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 남녀의 평등한 권리 확립을 목표로 봉건적 억압의 철폐를 위한 교육 계몽운동이다. 둘째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으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민족적, 계급적 차별에 대항한 자연발생적 투쟁을 촉진하고 지원하기 위한 반제․반봉건 투쟁 여성 계급운동이다.

이 시기 여성운동의 두 흐름은 1927년 근우회(槿友會)의 창립으로 통합되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전개하다가 1930년 일제의 탄압으로 근우회가 해산되자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지하화되었다. 근우회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계 여성단체와 1924년 최초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등의 사회주의계 여성단체를 통합한 여성운동조직이다. 근우회는 가부장제의 폐습과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을 여성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이 시기의 여성운동은 애국 계몽적 성격과 반제․반봉건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의 여성운동
미군정기와 1950년대

일제강점기 두 흐름의 여성운동의 맥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흐름은 남녀 평등한 권리의 확립을 주목표로 하였다. 이는 친일경력이 있는 기독교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조선여자국민당, 독립촉성애국부인회 등을 조직하였고, 우익 정치단체들의 정치활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흐름은 독자적인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과 여성해방을 목표로 노동여성, 농가부녀, 소시민주부, 인텔리여성 등의 전국 조직인 조선부녀총동맹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여권론적 여성운동이 우익정치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여성대중에 주력한 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은 생활개선운동과 1948년 2월 공창제를 법적으로 폐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미군정기와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기층 대중여성의 제반 문제를 함께 나누던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의 흐름은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소멸되고, 미군정의 지지를 받던 우익 여성단체들의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운동만 유지되었다. 전후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운동단체는 6․25전쟁 피난민, 불우여성, 고아들을 대상으로 구호와 선도 및 보호 사업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새로운 전문적인 여성단체들인 여성문제연구원, 대한약사회, 가정법률사무소 등이 조직되어 기존 여성단체와 결합하여 1959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구성하지만, 여성해방과는 거리가 먼 여성단체의 활동으로 여성운동 성격은 약하였다.

1960년 ∼ 1970년대 여성운동

제3공화국과 유신시대는 취미나 교양, 직업집단의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유신정권을 지지하는 여권론적 부르주아 여성단체의 활동이 주였고 여성운동의 성격은 약하였다. 하지만 1973년 62개 여성단체가 ‘범여성 가족법 개정촉진회’를 구성하여 가족법개정운동을 한 결과 성차별조항을 완화하는 범위 내에서 가족법이 개정되는 성과가 있었다. 또한 한국소비자연맹과 소비자보호협의회를 중심으로 소비자보호운동도 하였다. 소비자보호운동은 1960년대 후반 국내 생산업자와 유통업자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고,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일본상품의 국내유입 시 국내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었다.

한편 유신정권을 지지하는 여성단체들의 활동과 달리 한국크리스찬아카데미는 여성문제를 사회문제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여성운동을 여성의 단순한 지위향상이 아닌 인간화운동으로 정의하고, 근로여성, 중간층 여성, 주부, 전문직 여성 등을 대상으로 여성교육운동을 하였다.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후속 모임을 통해 가족법 개정운동과 미인대회 폐지운동을 전개하였고, 근로여성교육을 이수한 여성노동자들의 모임인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는 사회민주화운동과 여성노동자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여성노동자운동은 사회가 민주화되면, 젠더문제와 노동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아 젠더과제를 부차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의 성격이 약하였다고 평가된다.

이처럼 해방 이후 1960년대, 1970년대 유신시대 여성운동은 독재정권을 지지하거나 독재정권에 대항한 사회민주화운동에 통합되어 여성운동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침체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의 여성운동

1980년대 여성운동

운동의 과제와 내용

침체된 1960년대, 1970년대 여성운동은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진보적 여성운동가’들이 형성되어 여성해방을 목표로 한 여성운동이 복원되었다. 1983년 6월 ‘여성평우회(女性平友會)’의 창립을 계기로 ‘여성의 전화’, 1984년 4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여성부(민청련여성부라 함)’, 동년 12월 ‘또 하나의 문화’, ‘교회여성운동단체’가 조직되어 1980년대 초반 여성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여성평우회는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여성억압기제를 가부장제 사회구조로 상정하여 여성문제의 원인을 명확히 하였고, 1980년대 이후 여성운동에 기반이 되었다. 여성평우회는 초기 25세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운동을 시작으로 1985년 제1차 3․8여성대회시 또 하나의 문화나 주부아카데미협의회를 포함한 여성단체협의회와 광범위한 연대를 이뤄, ‘민족․민주․민중’과 함께 하는 1985년 ‘여성운동선언’을 하였다. 여성평우회는 여성운동의 주체를 기층여성, 운동의 과제로 ‘기층여성의 문제’로 설정해, 1985년에는 성도섬유의 부당노동행위와 노동탄압 대책과 톰보이상품 불매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1986년 기층여성운동 지원을 위한 ‘여성생존권대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시기 여성노동자들은 치열한 생존권 투쟁과 함께 노동현장에서의 모성보호와 같은 젠더과제 실현을 위한 운동을 하였는데, 노동운동에서의 여성주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여성운동사적 의미를 지닌다. 반면에 노동현장에서의 성폭력이나 구사대 폭력 등의 문제들이 제대로 여론화하거나 드러내지 못하였지만, 1984년 민주화시위 관련 여대생 추행사건과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계기로 10개 단체가 ‘여대생추행사건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26개 단체가 ‘여성단체연합 성고문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여대생에 대한 성폭력문제를 사회 쟁점화했고, 성폭력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 성폭력 문제는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표출되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민족민주운동을 하던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고문과 성적 폭행’의 문제로 인식하여, 민주화의 실현을 통해 성폭력문제는 해결해야 된다고 보았다.

‘또하나의 문화’도 소집단 활동과 대중매체를 통하여 한국사회의 ‘가부장제적 권위주의, 획일주의, 성차의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남녀평등 지향적인 대안문화 만들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성의 전화’는 가정폭력문제 중심으로 활동을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를 본격적으로 사회 이슈화시켰다. ‘민청련여성부’는 민주화운동으로서 여성운동, 기층여성운동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이후 ‘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열린 정치적 공간에서 서울을 비롯해 전국 타 지역에 여성운동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창립되어, 여성운동은 양적인 성장과 함께 내용적으로 분화되면서 발전하였다. 서울에서는 1987년 2월 생존권대책위, 성고문대책위를 모태로 21개 여성단체가 연합하여 ‘ 한국여성단체연합’이 발족되었고, 같은 해 3월 1970년대 민주노조에서 활동을 하던 여성노동자출신과 여성평우회 출신의 여성지식인 활동가들이 여성노동자운동단체인 ‘한국여성노동자회’를 창립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여성평우회의 구 회원들인 여성지식인 활동가들과 주부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여성민우회’를 결성하여 1980년대 이후 주부중심 여성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국 각 지역에 여성운동단체들이 결성되어 여성운동은 지역화와 대중화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노동문제와 여성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여성노동자운동단체로 인천에 인천노동자회(1987년 1월), 부천에 부천여성노동자회(1989년), 부산에는 부산여성노동자의 집(1988)이 결성되었다. 지역 중간층 여성중심의 여성운동단체로 수원에 수원여성회(1989년), 대전에 충남여민회(1987년), 대구에 대구여성회(1988년), 마산에 경남여성회(1987년), 부산에 부산민주청년회의 여성분과를 중심으로 한 여성회(1989년), 광주에 광주전남여성회(1988년), 전주에 전북민주여성회(1988년), 제주도에 제주여민회(1987년) 등이 결성되었다. 이처럼 전국 각 지역에 여성운동단체들이 창립되어 지역여성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외 여성운동의 영역도 확대되었다. 또 하나의 문화는 동인지 출판을 통해 여성주의 담론을 대중화시키고 대안적인 교육, 문화 활동을 하였고, 1989년 9월 진보적인 여성주의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한국여성연구소 전신인 ‘한국여성연구회’가 창립되어, 기관지인 『여성과 사회』와 『또 하나의 문화』 동인지가 여성주의 담론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988년 『여성신문』의 창간도 여성주의 담론의 대중화 및 문화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성운동의 특성과 의의

198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은 빈민, 농민, 생산직과 사무직 여성노동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결합하여, 운동의 중심과제로서 민주화, 여성 생존권 쟁취 및 기층여성운동력 강화, 여성권익향상, 남녀고용평등법 및 가족법 개정운동, 탁아입법 제기, 인신매매 및 성매매 방지운동 등의 법과 제도 개선을 목표로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대 여성운동의 특징과 의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운동에 대한 이론적 접근과 체계적 연구가 시작되어, 여성억압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성과 계급 논쟁이 제기되었다. 둘째, 여성운동의 정체성을 기층 여성에 두었다. 셋째, 여성운동의 지역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넷째, 여성운동에서의 정치투쟁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1987년에 21개 여성단체가 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보다 여성운동을 발전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여성운동

운동의 과제와 내용

1990년대 여성운동은 성폭력 추방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법․제도개선운동, 정치세력화, 성 주류화 전략 채택, 평화 및 통일 운동 등 2000년대 여성운동의 틀을 마련했다. 1990년대 여성운동을 정리하면, 첫째, 성폭력 추방운동이 중심이 되어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운동영역을 급진적으로 확장시켰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성애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공개적으로 전개되었다. 1990년대 여성운동의 대중적인 이슈는 성폭력 문제였다. 다양한 성폭력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일반 여성이 수치심을 딛고 당당하게 피해 여성의 고통과 이중적인 성규범 문제를 드러냄으로써 피해자가 운동의 주체로 나서서 성폭력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1990년대 성폭력 운동은 1986년 ‘권인숙사건’으로 대표되는 민주화나 노동운동 탄압 등과 연계된 문제로서가 아니라, ‘여성의 성(sexuality)에 대한 폭력’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는 것, 성폭력은 성관계가 아니라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구조화된 사회적 폭력이라는 것, 성폭력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한 남녀관계를 지속시키는 가부장제의 문제라는 점 등은 여성운동사에서 의미가 컸다.

성폭력 방지운동은 ‘여성의 전화’와 1991년 4월 창립된 ‘한국성폭력상담소’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 담론을 형성하고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도우면서 전개되었다. 또한 1990년 11월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창립되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시민단체 및 재일동포 여성들과 연대를 통해 국제적으로 제기하였다. 여성운동은 이러한 연대를 바탕으로 통일운동에서도 큰 성과를 얻었다.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 개최에 성공함으로써, 최초로 민간차원의 남북교류를 진전시켜 남북관계의 새장을 여는 성과도 있었다.

둘째, 여성주의 문화운동은 새로운 단체들의 창립과 출판활동, 교육 활동을 통해 활성화되었다. 여성주의 매체는 『여성과 사회』와 『또 하나의 문화』 같은 동인지에 불과했으나 여성주의적 소설이 등장하면서 페미니즘을 대중화시켰다. 또한 1992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이하 여문)’이 창립되어 여성주의 문화예술 활동은 여성주의 문화예술가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국내외 여성주의 단체들과 연대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여문이외에 1997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와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 여이연)’가 창립되어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틀이 확장되었다.

셋째, 여성 관련 법의 개정․제정과 제도의 개선에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이는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를 계기로 국가정책에 성 주류화 전략을 채택하여 가능했다. 이 시기 여성운동의 성과로 제․개정된 여성관련 법은 공무원 임용시 여성채용목표제도입(1995), 공무원의 육아휴직제 및 가족간호제 신설(1995), 양계혈통주의로의 국적법개정(1997), 일본군위안부생활안정지원법 제정(1993),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2006),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1995),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1999), 윤락행위등방지법의 개정(1995), 여성발전기본법의 제정(1995),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등에 관한 법률(2006), 호주제 폐지(2005) 등이다.

넷째, 여성운동의 연대활동이 확대되었다. ‘여성연합’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를 포함해 56개 여성단체가 모여 ‘할당제 도입을 위한 여성연대’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 연대 이외에 정부의 소수대표와 NGO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국제적 연대 활동인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이다.

다섯째, 여성의 정치세력화 활동이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지방자치시대 여성의 정치진출 확산과 활성화를 도모하였고 그 결과 여성의 정치진출이 확대되었다.

여섯째, 여성노동자운동이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와 지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민우회’ 노동센터 등 2000년 이후 여성노조를 중심으로 여성의 평생평등노동권, 모성 보호권 확보 투쟁을 하였다. 또한 여성빈곤 문제에 대한 국가의 대책 및 대안을 촉구하고, 여성의 빈곤화를 방지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으며, 1998년 저소득 실직 여성 가장 돕기 사업을 수행하였다.

일곱째, IMF이후 빈곤문제와 맞물려 폭력 추방운동을 하였다. 세계화시대에 여성에 대한 폭력문제는 빈곤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서 인식하고, 각국에서 ‘빈곤과 폭력 추방대회’를 열고 이 문제에 대한 국가적 대책을 촉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97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가 창립된 후 남북한민간교류 사업을 계승하면서 여성주의적 반전․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운동의 특성과 의의

여성학 강좌의 대학 개설과 여성주의 소설의 등장으로 페미니즘이 대중화되자 여성운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사회에 널리 홍보하면서, 여성운동의 과제를 사회의 보편적 과제화하는 활동들을 하였다.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에서 채택된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과 여성운동의 궁극적 과정이자 목표로 설정된 여성의 세력화(Empowerment)는 여성운동의 새 패러다임이 되었다. 여성의 세력화는 ‘끼어들기’가 아니라 정치의 ‘틀 바꾸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공사영역을 재정치화하고 일상생활을 정치의 장으로 만드는 비정치적이었던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정치를 재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1980년대 여성운동의 결과 운동의 주체역량 강화는 여성적 정체성과 차이의 정치학을 중시하는 여성운동의 새 세대인 영(young) 페미니스트들을 등장시켜 여성운동의 영역이 확대되고 분화․전문화 되었다. 이에 1970년대, 1980년대 사회민주화의 이름으로 통합되어 있던 젠더 과제가 성(sex), 섹슈얼리티, 환경, 교육, 문화, 통일과 평화, 노동 등으로 분화되었다.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의 유입과 함께 특히 섹슈얼리티와 문화영역에서의 여성운동은 활성화되어,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 여성운동의 이슈와 실천 방안에 관한 새로운 주장과 담론이 형성되었다.

여성운동 새 세대는 1990년대 중반 대학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급진적 페미니즘적 성향이 강했다. 이들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슬로건을 내걸고, 성범죄를 포함한 여러 유형의 남성 폭력과 은밀하고 사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이슈화하였다. 이들은 운동하는 개개인이 행복해야 여성운동도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으로 ‘나 자신이 행복한 방식의 운동’을 주장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 소모임 활동, 여성적 글쓰기를 통한 운동, 대학 내에서 ‘성정치 문화제’, ‘월경 페스티벌’ 등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기존의 한국 여성운동의 두 축인 ‘여성연합’과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올드(old) 페미니스트라 규정하고, 자신들을 영(young) 페미니스트로 칭하였다. 이들은 올드 페미니스트 중심의 기존 여성운동은 조직의 거대화, 운영방식의 관료화로 인해 급진적인 여성 이슈를 다루지 못한다고 비판하였고,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은 개인의 삶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존재하므로 ‘일상에 시비 걸기’를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초한 담론 형성과 움직임은 운동의 이슈와 영역의 확대와 함께 다양화하여 여성운동 내부의 차이를 가져왔다.

2000년 이후 여성운동

여성운동의 과제와 내용

2000년 이후 여성운동은 1990년대 후반의 여성운동의 주체와 영역이 확대와 함께 다양해진 운동의 과제와 내용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특히 문화운동 영역이 더욱 더 다양해졌고,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여성장애인, 소수여성, 이주여성이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또한 1990년대 제․개정된 여성관련 법과 제도 등이 만족할만하지는 않지만, 보다 더 성 평등적으로 정비되었다.

2002년에 『우먼타임스』, 『미즈엔』이 창간되면서 여성주의 언론도 다변화되었다. 우선 여성주의 문화운동은 중앙 중심에서 탈피해 상대적으로 문화에서 소외되어 있던 지역에서의 영화제, 미술제, 음악제, 교육에 있어서 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주도 아래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1999년부터 열린 국제영화제인 서울여성영화제는 아시아지역 여성영화인들과 연대,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영화관련 문화 영역의 활성화, 국제 네트워크 구축, 영화제를 통해 확보된 자료로 영화 아카이브를 구축하여 지역 여성영화제를 활성화시켰다. 이외 사이버공간을 중심으로 실업, 성폭력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주의 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이들에 의해 제기된 2000년 12월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의 ‘100인위 사건’은 진보진영 내 성폭력과 성의식에 대한 문제점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새로이 주체로 등장한 여성장애인의 경우, 여성과 장애인으로서 겪는 이중적 차별구조에서 이들이 겪는 빈곤과 폭력의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1999년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창립되었다. 이는 1998년부터 2000년에 걸쳐 부산을 포함해 7개 지역에서 창립된 ‘여성장애인연대’와 함께 폭력문제, 이동권, 모성권 등 여성장애인 관련 주요 이슈들에 초점 두어 활동하였다. 또한 이주여성의 경우, 이들의 인권을 위한 모임이 조직되었고, 평화와 통일운동을 주도한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전쟁을 반대하는 여성연대 WAW’도 조직되어 운동의 주체와 내용이 확장되었다.

여성노동자운동영역도 분화되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로 인해 더욱 열악해진 여성노동문제, 여성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노조인 ‘전국여성노동조합’과 ‘서울여성노동조합’이 조직되어 2000년대 여성노조 시대를 열었다. 여성노동자운동은 IMF 이후 비정규직화 되는 여성노동자들의 권리 보호투쟁과 빈곤의 문제를 운동과제로 하여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기본권보장과 차별철폐를 위해 공동대책위원회에 결합하여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2002년 ‘비정규 여성노동자 권리 찾기 전국 릴레이 캠페인’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3법 적용운동과 함께 모성보호 개정 및 정착화 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00년 군산대명동 화재사건, 2002년 군산개복동 화재사건에서 성매매 종사 여성들의 비참한 죽음과 노예적인 삶이 드러나면서 성매매방지법 제정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성매매방지법 제정운동은 성매매현장에서 활동해온 ‘새움터’와 ‘매매춘근절을 위한 한소리회’ 등과 함께 ‘여성연합’이 주도하였다. 성매매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적 착취’임을 규정한 국제협약에 근거해, 성매매를 ‘사회적 필요악’으로 주장하며 존속시키려는 남성 중심적 인과 담론과 투쟁하면서 성매매를 유도하는 공직 사회 및 기업의 술자리 및 접대문화의 변화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하였다.

그 결과 2004년 3월 2일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었고, 이와 함께 여성관련 법과 제도의 개선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즉 2000년 정당법 내 여성공천할당제의 신설, 2001년 여성부 신설을 위한 정부조직법의 개정,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 제정, 2002년 여성발전기본법의 개정,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과 근로기준법의 여성보호규정 개정, 공무원 임용시험령의 양성채용목표제의 도입, 국가공무원법의 육아휴직제도의 개정, 특히 2005년에는 여성운동의 숙원인 호주제 폐지가 그것이다. 여성의 정치세력화와 관련해서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낙천낙선운동을 하였으며, 2002년 지방의원 선거에서는 광역의원 비례대표 50%, 지역구30%를 여성에게 할당 공천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운동의 특성과 의의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실업과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으로 인해 2000년대 여성운동은 여성실업과 빈곤문제, 여성노동의 비정규직화를 중요 이슈로 하였다. 또한 문민정부 이후 정부와 젠더 거버넌스를 수행하면서 ‘젠더의 제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진보적 여성운동도 제도화되었다. 이는 여성운동이 성인지적인 정책수립을 위한 운동에 치중하면서 법과 제도 개선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여성정책의 수립과 실행의 파트너로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한 데 기인한다.

특히 진보적 여성운동의 제도화는 1995년 베이징대회에서 여성정책의 전략으로 채택된 성 주류화를 실현하기 위해 여성전담기구의 발전과 정부 각 부처의 중요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위원회에 30% 여성할당을 요구하고 참여하면서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성인지적 관점에 따라 행정조직도 개편되었다. 청소년, 아동, 노인 등과 함께 여성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던 정무장관 제2실을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로 개편하였고, 행정자치부, 법무부, 교육부, 보건복지부, 농림부, 노동부 등 6개 부처에 여성정책담당관실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여성특별위원회가 여성업무만 담당한다 하더라도 정무장관 제2실보다 조직과 인력이 취약하고, 기능과 권한, 차별사례 분쟁조정 등에 입법적․준사법적 기능이 부재하거나 미흡해 정책을 집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2000년 12월 정부조직법의 개정을 통해 2001년 1월여성부를 출범시키고, 2005년에는 여성가족부로 확대시켰다.

현대 여성운동의 평가와 앞으로의 과제

1980년대로 오면 진보적 여성지식인들이 기층여성들과 함께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여성해방을 목표로 한 여성운동이 전개되는데, 다음과 같이 평가해 볼 수 있다. 첫째,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성 평등사회 실현’이라는 여성운동의 과제를 사회 구성원이 함께 추구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둘째, 여성운동의 주체 및 영역이 확장되었다. 운동의 주체는 진보적 여성지식인에서 소수자인 성매매 피해 여성 및 성적 소수자 여성, 이주 여성들까지 확대되었다. 운동영역도 정치, 사회, 경제 등 공적인 영역에서부터 성폭력, 가정폭력 등 사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셋째, 지방자치제의 실시와 함께 여성운동이 지역 풀뿌리 운동과 결합해 지역화, 대중화하였다. 넷째, 호주제가 폐지되는 등 법, 제도 개선에서 눈부신 성과가 있었다. 여성 관련 법률이 제정되거나 개정되었고, 특히 3대 여성인권법인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폭력으로써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다섯째, 정부가 각종 정책에 성인지적 관점과 성 주류화전략을 채택하게 하였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앞으로 여성운동의 이념을 모든 사람의 평등, 평화, 인권, 복지로 나가는 이념으로 확장하여 여성들은 남성과 함께 성 평등 사회를 실현해야 한다. 이에 여성운동은 사회전반의 민주주의 실현, 평화체제의 구축과 통일, 지속가능한 생태사회, 인권과 복지의 실적인 보장 등 사회개혁 과제에 대한 대안적인 패러다임으로써 대안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야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일하는 여성』(한국여성노동자회, 1988∼2010)
『함께 가는 여성』(한국여성민우회, 1988∼2010)
『정기총회 자료집 모음』(한국여성단체연합, 1987∼2004)
『여성평우회 창립 20주년 기념-여성평우회 발자취』(여성평우회 창립2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2003)
『열린 희망』(여성연합 엮음, 동덕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 1998)
『민주여성 합본호』(한국여성단체연합, 1997)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이효재, 정우사, 1989)
『한국 근대 여성사』상․하 (이옥주, 규문각, 1985)
『또 하나의 문화』 1호∼4호(또 하나의 문화, 1995)
『여성평우』 창간호∼ 3호 (여성평우회, 1984)

논문

「여성운동과 여성내부의 차이」(오장미경, 『진보평론』 제20호, 2004)
「한국여성운동의 흐름과 쟁점」(강남식, 『기억과 전망』 여름호, 2004)
「마산지역 여성단체의 활동과 운동」(강인순, 『대학원논총』 12집 1권, 경남대학교 대학원, 1997)
「민주화의 길」(민주화운동청년연합부설 민족민주운동연구소, 『민족민주운동』 창간호, 1989)
「유신체제하의 국가와 여성단체」(서명선, 이대 여성연구소, 『여성학 논집』 6집, 1989)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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