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운동으로 수감된 민족운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1919년 4월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두 정신여학교 출신들이었다.
정신여학교 졸업생으로 당시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에서 일하던 이정숙(李貞淑)과 정신여학교 교사로 일하던 장선희(張善禧)를 중심으로, 황해도 재령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교사 오현관(吳玄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 멜볼딘여학교 교사 오현주(吳玄洲), 정신여학교 사감 김영순(金英順) 그리고 이정숙의 동기였던 이성완(李誠完) 등이 주축이었다.
주요 활동은 3 · 1운동 관련 수감자들에 대한 사식(私食) 차입, 가족들에 대한 생활 구제, 사망한 민족운동자 유족의 지원 등이었다. 활동에 필요한 자금은 회원들이 매달 1원 이상의 회비를 모아서 마련하였으며, 부족한 금액을 보충하기 위해서 참기름과 각종 일용품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 임득산(林得山)이 가지고 온 편지를 장선희(張善禧)가 김돈화로부터 전달받은 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기구를 확장하고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락체계를 갖추었다.
한편, 당시 서울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京城女子高等普通學校) 출신의 김원경(金元慶), 최숙자(崔淑子) 등이 결성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가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성단체 대표자 파견 문제를 의논해오자, 당시 대한청년외교단(大韓靑年外交團)의 총무였던 이병철(李秉徹)의 주선으로 두 단체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통합이 결정되어 '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로 발전,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