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애국부인회 ()

근대사
단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지원하면서 그 산하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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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지원하면서 그 산하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단체이다. 국내에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 상하이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별도로 조직되었다. 서울의 애국부인회 회원은 교회지도급 여성과 여교사·간호사 등이 주축을 이루었고 평양의 애국부인회는 평양장로교계 부인회와 감리교계 부인회가 통합·발전한 것이다. 이들은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다가 많은 수난을 겪었다. 상하이 애국부인회는 일본패망 촉구방송, 일선군인 위문, 여성 계몽교육 등의 활동을 펼쳤다.

목차
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후 이를 지원하면서 그 산하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여성단체.
개설

서울 중심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등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1. 대한민국애국부인회

1919년 3월 중순, 오현주(吳玄洲) · 오현관(吳玄觀) · 이정숙(李貞淑) 등이 3 · 1운동 투옥지사에 대한 옥바라지를 목적으로 혈성단부인회를 조직 · 활동하였다. 4월에는 최숙자(崔淑子) · 김희옥(金熙玉)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두 부인회는 그 해 6월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을 위해 통합하였다.

지방에 다수의 지부까지 두었으나 활약이 부진하자, 김마리아(金瑪利亞)와 간부들은 발전적 해체를 통한 재조직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에 17명이 김마리아 거처인 천교장 2층에서 장시간의 비밀회합 끝에 새로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애국부인회는 서울에 본부를, 지방에 지부를 조직하고 본부 부서를 대폭 개편하였다. 종래의 애국부인회는 군자금 모금과 송달을 최대 임무로 여겨 재무부장 · 재무주임의 직을 두어 주력하였다.

그러나 새로 탄생된 애국부인회에는 종래에 없던 적십자부장과 결사부장을 각 2명씩 두어 항일독립전쟁에 임할 철저한 자세를 가졌다. 본부 부서에는 회장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李惠卿), 총무 황에스터(黃愛施德), 재무장 장선희(張善禧), 적십자부장 이정숙 · 윤진수(尹進遂), 결사부장(決死部長) 백신영(白信永) · 이성완(李誠完), 교제부장 오현주, 서기 신의경(辛義卿), 부서기 김영순(金英順) 등이었다.

지부는 서울 · 대구 · 부산 · 흥수원 · 재령 · 진남포 · 원산 · 기장 · 영천 · 진주 · 청주 · 전주 · 군산 · 황주 · 평양 등에 설치하고, 각 지부에도 결사대를 두었다. 애국부인회는 부인들을 각성시켜 국권과 인권의 회복을 목표로 하였으며, 국민된 의무를 다하고 공화국 국헌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애국부인회는 민주주의 이념의 확고한 기초 위에서 항일 여성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활동한 지 1∼2개월에 약 6,000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상하이로 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 두 달 만에 백 수십 명의 회원을 규합하였는데, 교회지도급 여성과 여교사 · 간호원 등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 중 간호원이 가장 많았던 것은 독립전쟁에서 백의천사로 활약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애국부인회 활동이 활발히 추진되던 그 해 11월말경 한 간부의 배신으로 서울과 지방의 간부 및 회원들이 경상북도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일제히 체포되어 대구경찰에서 취조를 받았다. 취조를 받은 사람은 52명이었으며, 그 중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김마리아 등 9명만 기소되었다.

이들은 취조 심문 중 “한국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 일본 연호는 모르고 서력만 안다.”라고 답변하는 등 철저한 항일독립정신의 투지를 보였다. 이들의 최종 형량은, 김마리아 · 황에스터는 각 3년, 이정숙 · 장선희 · 김영순은 각 2년, 유인경(兪仁卿) · 이혜경 · 신의경 · 백신영은 각 1년이었다.

  1. 대한애국부인회

평양 중심의 대한애국부인회는 평양 장로교계 부인회와 감리교계 부인회가 각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던 중 임시정부의 권유에 따라 연합하여 평양에 연합회 본부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두어 동지를 규합, 활약하는 계통적 비밀결사로 통합 · 발전한 것이다.

장로교계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하순 한영신(韓永信)의 ‘남자와 똑같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동포권 의무’라는 발의에 찬동하는 교회 중진급 부인들로 조직되었다. 감리교계 애국부인회는 그 해 6월 중순 박승일(朴昇一) · 손진실(孫眞實) 등이 임시정부를 원조하는 항일독립운동을 발의하여 조직되었다. 두 부인회는 8월 중순부터 연합 협의를 하여 그 해 11월 대한애국부인회로 연합되었다.

연합 과정에서 ① 본부는 평양에 두고 지회는 각지에 둔다. ② 본부의 임원은 양쪽 부인회에서 공평하게 선임한다. ③ 기설 각 부인회는 모두 지회로 한다. ④ 지방교회 부인 유지를 권유하여 지회를 설치한다. ⑤ 회비 외로 군자금을 모집한다. 등의 사항에 대한 협의 결정이 전제되어 통합되었다. 애국부인회의 총재는 오신도(吳信道), 회장은 안정석(安貞錫), 부회장은 한영신이었다. 동지를 규합하고 지회를 증설하였으며, 군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에 송부하고,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사업이 확대되어 갔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 15일, 금산지회장 송성겸(宋聖謙)이 군자금 송치 중 붙잡혀 관련인 106명이 검거되었다. 1921년 2월 24일 평양 복심법원은 박승일 징역 3년, 최매지(崔梅智) · 안애자(安愛慈) · 양진실(梁眞實) · 김성심(金誠心) · 김용복(金用福) · 이겸량(李謙良)에게 각 2년 6월, 안정석에게 2년, 박현숙(朴賢淑)에게 1년 6월, 오신도에게 1년을 언도하였다.

  1. 상하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국내에서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활약하자, 1919년 10월 13일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다. 조직은 회장 이화숙(李華淑), 부회장 김원경(金元慶), 총무 이선실(李善實), 서기 이봉순(李奉順) · 강현석(姜賢錫), 회계 이메리 · 이교신(李敎信), 출판부 및 교제 · 사찰 등이다.

이 부인회에서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태극기를 만들고 회의장을 준비하고 상장을 만드는 것 등이다. 1920년대 후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위축되자 상하이 애국부인회의 활동도 미약해졌다. 1943년 2월 23일 충칭(重慶)에서 각계 여성 50여 명이 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가지고 주석에 김순애(金淳愛), 부주석에 방순희(方順熙), 그 밖에 조직 · 선전 · 사교 · 훈련 · 서무 · 재무 등에 각각 부장을 두었다.

이들은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제분야에서 남녀간에 실질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리는 민주주의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공동 분투하겠다는 7개 항의 남녀동권향유강령을 반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의 패망을 촉구하는 방송, 일선군인 위문, 여성에 대한 계몽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참고문헌

『한국여성독립운동사』(3·1여성동지회, 1980)
「1920년대초항일부녀단체지도층형성(1920年代初抗日婦女團體指導層形成)과 사상(思想)」(박용옥, 『역사학보(歷史學報)』69, 1976)
『독립신문(獨立新聞)』
『매일신보(每日申報)』
『동아일보(東亞日報)』
『朝鮮獨立運動』Ⅰ分冊(金正明 編,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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