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군 ()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재령 부분
대동여지도 중 황해도 재령 부분
인문지리
지명
황해도 중앙에 위치한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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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황해도 중앙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으로는 봉산군·평산군, 서쪽으로는 안악군·신천군, 남쪽으로는 벽성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5°33′∼125°56′, 북위 38°09′∼38°34′에 위치하며, 면적 739.8㎢, 인구 11만 9800명(1944년 현재)이다. 1개 읍 10개 면 137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재령읍 일신리이다.

자연환경

서남부에는 멸악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다. 중부의 상요봉(相堯峰, 462m)·장수산(長壽山, 747m)을 비롯해 장수산의 제1봉인 보적봉(寶積峰)과 제2봉인 보장봉(寶藏峰)이 있고, 남쪽으로는 평산군과의 경계에 백락산(白樂山, 547m), 벽성군과의 경계에 운진봉(雲津峰, 600m)·운달산(雲達山, 494m)·대덕산(大德山, 494m) 등이 솟아 있다.

반면에 중부 이북은 재령강(載寧江)·은파강(銀波江)·서흥강(瑞興江) 등의 퇴적 작용과 서해안의 융기에 의한 높이 20m 이하의 광대한 평야를 이룬다.

평야지대를 북류하는 재령강은 대표적인 강으로 삼강(三江) 부근에서 은파강·서흥강과 합류하고, 하류에서 서강(西江)과 합류하기 때문에 항상 수량이 풍부해 관개와 수운에 도움을 준다.

검산(劍山) 서쪽에는 내를 막아서 만든 서지(西池)가 있다. 연평균기온 10.6℃, 1월평균기온 -6.9℃, 8월평균기온 25.4℃, 연강수량 843㎜이다.

역사

[고대]

이 군에서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근 평산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고, 안악·봉산 등지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이 곳에서도 구석기·신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재령읍 고산리 성황동과 청천면 부덕리 수역동의 토광묘에서 청동제 도끼와 동모·세형동검 등이 출토되어 청동기 문화를 이뤘던 것으로 확인된다. 부덕리 수역동의 토광묘에서는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서 한홀(漢忽)·내홀(乃忽) 또는 식성군(息城郡)이라 불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예성강 이북 지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경덕왕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개칭되었다.

762년(경덕왕 21)에는 현재의 장수산성인 한성(漢城)이 축조되어 대동강 연변을 지키는 방어선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태봉 때인 907년(효공왕 11) 무렵 안주(安州)로 개칭되어 약 300년간 이 지명으로 불렸다.

[고려]

995년(성종 14) 진으로 개편되어 방어사가 부임했으나, 1018년(현종 9) 폐지되어 지금의 해주인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임내로 예속되었다. 1106년(예종 1) 수령이 다시 파견되고 감무가 부임하였다.

1217년(고종 4) 이 곳에서 5군 원수가 거란 잔당의 침입을 막다가 대패해 거의 전멸했으나, 이를 계기로 재령현(載寧縣)으로 승격되어 현령이 부임하였다. 재령이라는 지명은 이 때 처음으로 나타난다.

마타리광산은 철 함유량이 높은 철광석이 점토 중에 덩어리로 산재해 있어서 고려 중엽에 이미 널리 알려져, 주민들이 이를 채굴해 농기구와 일반 생활 용구를 제작했다고 한다.

[조선]

1397년(태조 6)풍주(豐州)가 관할하던 삼지현(三支縣)을 합속해 지역이 넓어졌다. 1415년(태종 15)에는 1,000호 이상인 고을이 군으로 개정됨에 따라 재령군으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5세기 중엽의 호구는 1,293호 3,885명이었다.

관아는 원래 장수산 남쪽 기슭에 있었으나 1519년(중종 14) 전염병이 크게 돌아서 지금의 읍 소재지로 옮겨 왔다. 읍성으로 사용된 것이 바로 장수산성이며, 이것은 보기 드물게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1635년(인조 13) 재령군수가 장수산성을 지키는 장수직을 겸하게 하고, 또 별장 1인을 따로 두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도록 했으나 이듬 해 일어난 병자호란에서 별다른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1759년(영조 35) 호구가 6,827호 2만4351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재령평야에 위치해 농업 생산량이 많고 재령강을 통한 교통도 활발했던 율곶방(栗串坊) 등의 북부 지역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다.

[근대]

1908년 동양척식회사가 설립된 뒤 약 9,000정보의 경우궁(景祐宮) 소속 궁장토를 중심으로 북률농장(北栗農場)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재령의 쌀 생산량의 약 7할이 일제에 의해 반출되어 농민 생활이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1922년 이후 여러 차례 소작 쟁의가 일어났으며, 마침내 1926년 12월에는 이 곳 출신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지사에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제 요원을 사살하는 의거를 행하였다.

조선 왕실 소속이던 마타리광산 외에도 하성철광·은룡철광 등이 개발되어 미쓰비시제철 등에 의해 매년 약 23만 톤의 철광석이 반출되었고, 이를 위한 사설 철도도 부설되었다.

1930년 당시 1읍 10면 137리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그 뒤 행정구역상의 변화는 없었다. 1942년의 호구는 2만 529호, 10만 9756명이었다.

유물·유적

이 군에는 장수면 장국리 미력동의 어실구지(御室舊址)를 비롯해 태자 광해군이 묵었던 태자원(太子院)의 유지가 있으며, 선조 일행이 봉산을 거쳐 재령으로 오던 도중 나룻배 위에서 당쟁을 자성하는 대화를 나누었던 율곶진(栗串津)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어실구지는 민가의 터로 임진왜란 때 서울로 환도하던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하룻밤 머물고 간 곳이다. 전란 발생 이듬 해에 서울이 수복되었지만 왕과 조정 대신 일행은 전세를 관망하기 위해 곧바로 환도하지 않고, 그 뒤 의주행재소(義州行在所)를 떠나서도 영유(永柔)·강서(江西) 등지에서 머물다가 8월에 황해도로 들어왔다.

이 때에도 봉산과 재령을 거쳐 해주에서 한 달 동안 머물렀는데, 해주를 향하던 도중 8월 16일 봉산에서 율천진을 건너 재령읍에 당도하였다. 17일에 재령읍을 떠난 이들은 빗길을 헤치며 미력동에 다다라 이 곳의 민가에서 유숙하였다. 이에 이 곳 관민들은 이 집터를 길이 보존, 기념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환도할 당시 종묘의 신위를 모시고 왕과 조정 대신들을 뒤따르던 왕세자(뒤의 광해군) 일행이 재령에서 비를 만나 대자원(大慈院)에서 하루를 머무른 뒤 해주로 떠났는데, 그 뒤 대자원은 왕세자가 묵은 곳이라 하여 태자원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최근세까지만 해도 부속된 토지가 많았고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 시설 등이 있었다. 이는 세자 일행이 유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와 지방 관청에서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재령과 봉산 사이에는 조선 태조 초까지 풍주 관하 삼지현의 읍 소재지였던 삼강면 청룡리의 석성동(石城洞) 고읍터가 남아 있다. 석성동은 본래 이 곳의 읍 소재지였으나, 1397년에 삼지현을 없애고 재령에 병합한 뒤로는 점차 쇠퇴하였다.

그 뒤 재령군의 읍치(邑治)를 지금의 재령읍으로 옮기면서부터 배씨(裵氏)의 향중 인물들이 향청(鄕廳)을 설립해 향청의 발전과 함께 석성동도 부활되었다.

이 곳은 산수가 수려해 많은 인물과 부호를 배출하였다. 삼지현의 남산인 황산(黃山)에 오르면 사방이 훤하게 트여 넓은 재령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봉산군의 당성평(唐城坪)이 서흥군계까지 평탄하게 이어진 것이 보인다.

이처럼 아름답고도 광활한 조망이 끝없이 이어지므로 중국의 강남 풍경에 비겨서 소강남(小江南)이라고도 한다. 이에 황산에 올라 강남의 가경(佳景)을 보려는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이이(李珥)가 당파 싸움을 조정하려다가 지쳐 관직에서 물러난 뒤 도내 여러 곳을 소요하다가 주위의 경관이 수려해 잠시 머물렀던 세심대(洗心臺)와 이이가 낚시를 즐겼던 명수정(明水亭)이 있다. 또한 그 당시 이이를 따르던 이 곳 선비들이 이이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경현서원(景賢書院)이 있다.

장수면에서 북률면에 이르는 넓은 벌판을 관개하는 경우궁보(景祐宮洑)가 있다. 이것은 조선 인조 때 반정공신의 한 사람인 김자점(金自點)이 황주병사(黃州兵使)로 있으면서 축조한 것으로, 산업 시설뿐만 아니라 고적으로도 유명하다. 삼강면·남률면 일대에 보의 원형이 8·15광복 때까지 남아 있었다.

이 군의 한복판에는 기암 괴석으로 덩어리를 이루어 황해 금강으로 불리는 장수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이 산에는 고구려 때 쌓아 762년에 개축한 장수산성과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현암(懸庵, 일명 달암절)이 있다. 이 암자는 이엄대사(利嚴大師)의 강도장이었다.

산기슭에는 운점사(雲岾寺)·쌍문사(雙門寺)·석천사(石泉寺)·자복사(資福寺)·관책사·백운사·초암사·비래암·심적암·상대암·선적암·월영암·수정암·월출암 등의 옛 절터가 남아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1695년에 사액되어 이이와 주자를 배향한 경현서원이 있다. 근대식 교육기관으로는 구한 말에 명신소학교를 비롯해 양원학교(養元學校)·보강학교(保强學校) 등이 설립되었으며, 공립 보통 학교는 1면1교 정책에 따라 재령읍의 국화초등학교(菊花初等學校)를 선두로 각 면에 설치되었다. 이 밖에 변두리에는 분교 또는 간이 학교가 있었다.

양원학교는 을사조약 직후 도인권(都寅權)이 설립해 민족주의 사학의 첨단을 걸었으나, 도인권이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중형을 받자 강제 폐교되었다. 보강학교도 북률면 무상리에 개교해 김구·전승근 등이 교편을 잡으면서 준군사 학교와 같은 성격을 띠었으나 강제 폐교되었다.

문창학원(文昌學院)은 초등 과정으로 출발했으나 곧 중등 과정으로 발전해 재령상업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재령명신중학교는 1898년에 설립되었으며, 3·1운동 당시 명신학교 학생들은 서당의 학동들과 합세해 군중을 지도하였다.

이 밖에도 1910년대에 설립된 재령명신고등여학교와, 재령상업고등학교로 발족하였다가 학제를 개편한 재령공업학교, 1919년에 농업보습학교로 개교한 재령농업학교, 양잠학원 등이 있었다. 재령군은 신문화의 물결이 일찍 도래해 기독교가 크게 번창했으며, 신문명을 찾는 외지 유학생들이 많았다.

산업·교통

이 군은 평야의 경지율이 다소 높고 밭이 논보다 많기 때문에 쌀·보리·콩·목화 등이 고루 재배되고 있다. 재령강을 중심으로 한 재령 평야는 토질이 비옥하고 관개 수리 시설도 잘 되어 있어 쌀의 생산량이 많고 질도 우수하다.

1926년 재령 평야와 안악군의 일부 갈대밭이 안녕수리조합사업(安寧水利組合事業)에 의해 농지화되었으며, 안녕저수지가 있다. 1927년에는 재신수리조합(載信水利組合)에서 재신저수지를 건설했으며, 2군 8면에 걸친 관개 수리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리 시설의 대자본 투자는 일제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인 전 농가의 과반수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연간 쌀 생산량은 155만 섬으로 경지 면적당 수확고가 도내에서 제일 높다. 이 평야에서 생산되는 재령미(載寧米, 재령나무리벌쌀)는 무사미(無砂米)로서 최우수미로 취급되었으나, 생산량의 약 70%를 동양척식회사에 반출당하였다. 이 밖에도 녹두와 땅콩의 생산량이 많다.

지하 자원으로는 철이 풍부하다. 철광산으로는 금산광산(金山鑛山, 마타리)·하성광산(下聖鑛山)·은룡광산(銀龍鑛山) 등이 있다. 금산광산은 갈철광·적철광을 생산하는데, 이것은 철 품위 55%의 양질이다.

이 광산은 고려 중기부터 지방민이 채굴해 농기구와 일반 생활 용구 제작에 사용했으나, 중기 이후 폐광되었다가 일본인에 의해 다시 개발되었다.

군내에는 13개 장이 있으며, 면민의 기본적인 생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군은 평야의 중심인 동시에 남부가 광산 지대이므로 농산물과 철광석 수송을 위한 육로·해운이 잘 발달되어 있다.

도로는 재령을 중심으로 한 2등도로가 동쪽으로 사리원, 북쪽으로 안악읍, 남쪽으로 해주시에 이른다. 3등도로는 재령∼신천, 신환포∼사리원, 신원∼서흥군 서흥면, 상성면∼벽성군 신창리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재령강 하류의 상해·석해리·신환포 등의 포구는 비교적 큰 선박도 드나들 수 있는 항구이다. 이 밖에도 삼지강(三支江) 하류에는 율곶진이라는 나루터가 있고, 장수산 현암 아래에는 석동십이곡(石洞十二曲)이 있어 많은 사람이 찾아든다.

계곡 옆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 괴봉이 여기저기 솟아 있고, 우거진 노송과 고목 사이에는 덩굴식물이 암벽을 뒤덮고 있으며, 군데군데 푸른 소를 이루며 바위틈을 흐르는 옥류가 신비경을 이룬다.

석동십이곡의 길이는 약 4㎞에 달하며, 한 굽이를 지날 때마다 마천루 같은 절벽이 가로막아 나갈 길이 없는 것 같다가도 환하게 열리는 동천(洞天)이 나오고 기경(奇景)이 전개되어 문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읍·면

[재령읍(載寧邑)]

군의 북부에 위치한 읍. 읍 소재지는 일신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남정리 등 16개 이로 재령면을 편성하였다. 그 뒤 1937년 읍제(邑制) 실시에 따라 이웃 면의 몇 개 동리를 편입해 읍으로 승격되었다.

읍 전역은 소규모 구릉이 있을 뿐 대부분 재령 평야(일명 나무리벌, 棘城平野)에 속한다. 재령 평야는 토질이 기름지고 수리 시설이 잘 된 보기 드문 넓은 평야로서 각종 농산물의 경작에 적당하다. 이 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나무리벌쌀이라 하여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며, 조선 왕실의 진상품이었다.

주요 농산물로는 밀·팥·콩·조·과일·박하 등이며, 산출량이 많아 곡창 지대라 불린다. 특산물로는 사과, 사당골의 수박, 수창리장의 가지가 유명하다.

동부의 일부 지역은 재령철광구(載寧鐵鑛區)에 속한다. 재령 읍내장은 2·7일에 열리며, 농산물·일용 잡화·해산물·생우(生牛) 등이 거래된다.

철도는 황해선(黃海線)이 이 읍을 지나 장연 방면으로 달리며, 재령역이 있다. 도로는 정주읍과 사리원역을 잇는 2등도로가 황해선에 평행하게 나 있고, 북쪽의 안악과 남쪽의 해주를 잇는 2등도로에는 버스가 운행된다.

이 밖에도 주요 마을에는 등외도로가 있다. 또한 재령강을 이용해 대동강 연안 각지에 도달하는 수운(水運)도 교통의 큰 몫을 차지한다. 읍의 진산인 검산과 서쪽의 조산·서지는 소풍·행락의 명소이다.

일신(日新)·문창(文昌)·향교(鄕校)·석정(石井)·수창(壽昌)·남정(楠亭)·신대(新垈)·유화(柳花)·국화(菊花)·고산(孤山)·신정(新井)·양산(陽山)·봉천(蓬泉)·내야(內野)·한천(漢川)·임천(林泉)·벽산(碧山)·부성(富城) 등 18개 이가 있다.

[남률면(南栗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해창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8개 이를 관할했으나, 1938년에 신환포리와 무덕리를 서호면(西湖面)에 이속시키고 봉산군 서종면(西鍾面)의 좌곡리·내림리·진곡리를 편입하였다.

전역이 일망천리(一望千里)의 대평야로서 재령 평야의 중심지이다. 동쪽에는 재령강이 곡류하고 서쪽에는 서강이 흘러 재신수리조합의 수리 시설과 함께 평야의 관개에 이용된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콩·팥·목화·과실 등이다.

재령읍∼좌곡리간을 잇는 등외도로와 재령강 연안을 따라 개설된 등외도로가 있을 뿐이어서 교통은 불편하다. 해창(海昌)·야두(野頭)·고잔(古棧)·방성(方盛)·강교(江橋)·신연(新延)·좌곡(左曲)·내림(來臨)·진곡(津曲) 등 9개 이가 있다.

[북률면(北栗面)]

군의 최북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장하리이다. 동쪽의 재령강과 서쪽의 서강 사이에는 동서 약 5㎞, 남북 약 11㎞의 좁고 긴 평야가 전개된다. 서강은 북부 군계에서 재령강에 유입되며, 이들 하천 연안의 범람원은 비옥하고 관개 시설이 편리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물은 무사미로 유명한 쌀을 비롯해 조·콩·밀·팥·박하·과실 등이다.

교통은 황해선의 미곡역(嵋谷驛)과 신환포(新換浦)에 3등도로가 개통되어 있고,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장하리를 중심으로 개설되어 불편하지는 않다.

장하(長河)·내종(內宗)·진초(進礎)·북지(北芝)·남지(南芝)·신지(新地)·쌍교(雙橋)·무상(武尙)·굴해(屈海)·석포(石浦)·대홍(大洪)·강서(江西)·서신흥(西新興)·동신흥(東新興)·석해(石海) 등 15개 이가 있다.

[삼강면(三江面)]

군의 동북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청룡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삼지강면(三支江面)·은산면(銀山面) 등으로 되어 있었으나, 1938년 병합되어 삼강면이 되었다. 동남단에 소규모 구릉지가 있을 뿐 전역이 평지이다. 중앙부를 북류하는 재령강의 유역은 재령 평야에 속하는 옥야(沃野)이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콩·박하·과실 등이다. 근년에는 채소와 과수를 재배하는 농가가 증가하고 있다.

지하 자원으로는 철이 풍부하다. 금산광산의 적철광·갈철광은 함철 품위 55%로서 고려 중엽부터 채굴되었으며, 광석대(鑛石帶)의 길이 1㎞, 너비 760m에 달한다.

교통은 국철(國鐵) 경의선의 사리원역에서 황해선이 분기되어 중앙부를 횡단하며 삼강역(三江驛)이 설치되어 있고, 삼강역에서 다시 해주로 지선이 분기되어 광탄역(廣灘驛)이 설치되어 있다. 도로는 2등도로가 황해선과 나란히 나 있고, 이 도로에서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분기된다.

청룡(靑龍)·상해(上海)·은정(銀井)·당원(堂院)·광탄(廣灘)·용소(龍沼)·용교(龍橋)·설산(雪山)·은산(銀山)·금산(金山)·학교(鶴橋) 등 11개 이가 있다.

[상성면(上聖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청석두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6개 동리로 편성되었으며, 1938년에 상류면(上柳面)의 병암리·율라리·관암리 등과 하성면의 천정리를 편입하였다.

남단에는 멸악산맥에 속하는 운달산·장봉(將峰, 499m)이 동서로 뻗어 있고, 중부에는 백락산·칠봉산(七峰山, 590m)이 동서로 이어져 있으며, 남반부는 대체로 산지로 되어 있다. 반면에 북반부는 동쪽에 설화산(雪花山, 289m)이 있지만 재령강의 범람원에 해당되어 재령나무리벌이라 불리는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콩·박하·팥 등이다. 은적광산(銀積鑛山)에 속하는 면내의 광구(鑛區)에서는 아연·형석·중정석(重晶石)이 채굴되며, 병암리광산에서는 금·은이 생산된다. 사철(私鐵)인 황해선이 북부를 동서로 횡단해 신하성(新下聖)·구하성(舊下聖)의 두 역이 설치되었고, 신막∼해주간의 3등도로가 북부를 서남으로 관통한다. 이 밖에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있어 북부의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청석두(淸石頭)·수원(水源)·병암(屛巖)·율라(栗羅)·관암(冠巖)·천정(泉井)·월당(月堂)·중곡(中曲)·신촌(新村)·상신(上新) 등 10개 이가 있다.

[서호면(西湖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신환포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하호리면(下湖里面)·남률면·재령면 등으로 되어 있었으나 1938년 병합되어 서호면이 되었다.

전역이 광활한 평야지대로서 재령평야의 중심부이다. 서부에는 서강의 본류·지류가 남북으로 흘러 관개에 이용되며, 재신수리조합의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어 각종 농산물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과실 등이다.

교통은 황해선이 남단을 통과해 재령역(載寧驛)에 가깝고, 재령∼안악간의 2등도로가 중앙부를 남북으로 관통해 있으며 버스가 운행된다. 이 도로에서 주요 마을을 연결하는 등외도로가 분기된다.

신환포(新換浦)·무덕(武德)·왕현(旺峴)·신전(新田)·재천(財泉)·석산(石山)·창석(昌石)·신호(新湖)·신탄(新灘)·작도(鵲島) 등 10개 이가 있다.

[신원면(新院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신원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류면(上柳面)·하류면·하방면(下方面)의 25개 이로 되어 있었으나, 1938년에 병합되어 신원면이 되었다.

면 전역이 멸악 산맥에 속해 남쪽에 삼봉산(三峰山, 406m)·대덕산, 서쪽에 성암산(城巖山, 468m), 북쪽에 상요봉 등이 솟아 있다. 이들 산지에서 발원한 작은 내들은 염탄천(鹽灘川)을 이루고 동류해 재령강에 합류된다. 산지 사이의 계곡에는 좁은 경지가 산재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주요 농산물은 조·밀·쌀·팥·콩 등이다. 교통은 황해선이 신원역(新院驛)에서 Y자로 교차되어 사리원·재령·해주 방면과의 연락이 편리하고, 2등도로가 황해선과 병행해 해주로 통한다.

신원(新院)·가국(佳菊)·백우(白隅)·송림(松林)·염탄(鹽灘)·신정(新亭)·기양(岐陽)·가려(佳麗)·송학(松鶴)·계남(桂南)·원고(元古)·화석(花石)·신대(新垈)·무학(舞鶴) 등 14개 이가 있다.

[은룡면(銀龍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신창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용산면(龍山面)·은산면·화산면(花山面)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1938년 병합되어 은룡면이 되었다.

서남단의 장수산과 동남단의 은적산(銀積山, 305m)이 그 여맥을 뻗어내려 도처에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으나 북부는 대체로 낮고 평평하다. 재령강은 동남부에서 곡류하며 삼강면으로 들어간다. 평야 지대는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도 편리해 각종 농산물을 경작하기에 적당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밀·조·과실 등이다. 지하자원으로는 신유리의 은룡광산에서 금·은·아연·형석 등이 채굴된다. 특히 은룡광산은 예로부터 유명해 철광석 수송을 위한 사설 철도가 부설되었다.

교통은 황해선이 서북단을 지나며, 화산역(花山驛)에서 은룡광산이 있는 내토역(內土驛)으로 지선(支線)이 부설되어 있다. 도로는 주요 마을을 연계하는 등외도로가 있을 뿐이다.

신창(新昌)·석탄(石灘)·서창(西倉)·옥현(玉峴)·신유(新鍮)·구련(龜蓮)·신덕(新德)·창전(蒼田)·운양(雲陽)·수남(壽南)·용지(龍池)·봉오(鳳梧) 등 12개 이가 있다.

[장수면(長壽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장국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방면(上方面)·하방면·화산면·청수리면(淸水里面)에 걸쳐 있었으나, 1938년 병합되어 장수면이 되었다.

동쪽에는 장수산이 높이 솟아 산지를 이루고, 서쪽에는 상요산이 여맥을 뻗어 구릉지를 이룬다. 이에 두 산지 사이와 북부만이 평지로 되어 있다. 재령강과 그 지류들이 곡류해 형성한 범람원은 재령평야의 일부로서, 토지가 비옥하고 관개 시설도 편리해 농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쌀·밀·조·콩·팥 등을 생산하며, 부업으로는 양돈과 축우가 성하다. 교통은 황해선이 중앙을 남북으로 관통하여 장수(長壽)·미력(未力) 등 두 역이 설치되어 있고, 재령∼해주간 2등도로와 등외도로가 주요 마을을 연결하여 편리하다.

황해금강(黃海金剛)이라 불리는 장수산에는 석동십이곡·벽암계(碧巖溪)·수양폭포(壽養瀑布) 등의 절경과 현암·묘음사 등의 사찰이 있고, 장국리 미력동에는 어실구지가 있다.

장국(墻菊)·식성(食城)·서림(西林)·동림(東林)·청천(淸泉)·양현(凉峴)·양계(陽溪)·두목(杜木)·학현(鶴峴)·천마(天麻)·용천(龍泉)·재궁(齋宮)·용평(龍坪)·서원(書院)·동락(東洛) 등 15개 이가 있다.

[청천면(淸川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부덕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청수리면·화산면·우두천면(牛頭川面) 등으로 되어 있었으나 1938년 병합되어 청천면이 되었다.

면의 중앙에 한봉산(漢峰山, 100m)이 솟아 있을 뿐 대부분이 평지이다. 중앙의 구릉지를 흐르는 지류들은 동류해 재령강에 유입되고, 하천 연변에 전개된 넓은 평야는 재령나무리벌의 일부이다. 남부에 재신수리조합이 건설한 재신저수지가 있어 그 몽리 면적이 전 평야에 미친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여 쌀·콩·조·팥·밀을 생산하며, 부업으로 양돈·양계·축우도 성하다. 교통은 재령∼해주간의 2등도로가 서부를 통과하고, 신관리를 기점으로 한 등외도로가 주요 마을을 연계한다.

부덕(富德)·신곶(新串)·양대(陽垈)·곤산(崑山)·청천(淸川)·망월(望月)·부천(富泉)·원내(垣內)·송암(松巖) 등 9개 이가 있다.

[하성면(下聖面)]

군의 남동단에 위치한 면. 면 소재지는 아양리이다. 1938년 상류면에서 덕현·영월·삼학·입암·갈산 등의 5개 이를 편입하였다.

북부에 장수산, 동부에 칠봉산이 솟아 구릉지를 이루나 기타 지역은 대체로 평탄하다. 재령강의 상류가 곡류하면서 이루어놓은 범람원은 토지가 기름지고 수리 시설도 적당해 양질의 미곡 생산지로 유명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밀·조·콩·팥 등이며, 근년에는 과실의 산출도 증가하고 있다. 지하 자원은 하성철산에서 철광석, 하성아연광산에서 아연, 신덕리에서 석회석을 각각 채굴한다.

황해선이 신원역에서 분기되어 북부를 동서로 횡단하고, 신덕역(新德驛)이 설치되었다. 3등도로가 황해선과 나란히 나 있고, 등외도로가 아양리를 기점으로 주요 마을을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교통은 편리하다.

아양(峨洋)·운대(雲臺)·용호(龍湖)·장금(長錦)·송향(松香)·덕현(德峴)·영월(靈月)·삼학(三鶴)·입암(立巖)·갈산(葛山)·벽화(碧花)·검촌(儉村)·신덕(新德)·대청(大廳) 등 14개 이가 있다.

광복 후 변천

1952년 행정구역 개편시 재령읍·서호면(西湖面)·북률면(北栗面)·남률면(南栗面)·청천면(淸川面)의 전부와 은룡면(銀龍面)·장수면(長壽面)의 일부를 합해 새로운 재령군으로 신설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은 신원군(新院郡)으로 신설되었다.

1954년 황해도를 황해남·북도로 나눌 때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황해남도의 북동쪽에 위치하며, 동쪽은 은파군, 서쪽은 신천군, 남쪽은 신원군, 북쪽은 안악군과 황해북도 봉산군·사리원시에 접해 있다. 동경 125°33′∼125°48′, 북위 38°13′∼38°35′ 사이에 있으며, 면적 352.6㎢, 인구 13만4500여 명이다.

행정구역은 재령읍과 금산노동자구, 용교(龍橋)·석탄(石灘)·봉오(鳳梧)·서림(西林)·양계(陽溪)·천마(天麻)·장국(墻菊)·서원(書院)·청천(淸川)·신관(新串)·부덕(富德)·벽산(碧山)·고산(孤山)·재천(財泉)·신환포(新換浦)·강교(江橋)·굴해(屈海)·김제원(金濟院)·동신흥(東新興)·북지(北芝)·남지(南芝)·내림(內臨)·고잔(古棧)·봉천(蓬泉)·삼지강(三支江) 등 25개 이로 되어 있다.

재령군의 땅 모양은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길이가 짧다. 북쪽은 재령강과 그 지류인 서강(西江)이 촉대 모양을 이루고 있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땅이 넓어진다.

북쪽은 언진산맥(彦眞山脈)이 꺼져서 얕은 고재령만을 이루었는데, 이 만이 메워져서 재령평야의 일부가 되었다. 재령평야는 곡창 지대로, 가꾼 쌀을 먹고도 남는다 하여 ‘나무리(남은) 들’이라 불렸다.

서강의 서쪽에는 월호산(月扈山, 160m)이 있어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남쪽에는 멸악산맥(滅惡山脈)이 동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이 산맥은 장수산(長壽山, 747m)을 주봉으로 하며, 상요봉(相堯峰, 462m)으로 이어져서 재령군과 자연 경계를 이룬다. 동부에는 재령강을 막아서 된 은파호가 있고, 군의 중앙에는 장수호가 조성되어 관개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0.6℃, 1월평균기온은 -6.8℃, 8월평균기온은 25℃이며, 연평균기온은 900㎜이다. 지질은 화강암·화강편마암이 주를 이루며, 토양은 대부분이 산림갈색토이다.

재령평야는 재령강·서강·전탄천(箭灘川) 등의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고, 안녕(安寧)·재신(載信) 수리조합과 함께 은파호·장수호 등이 갖추어져서 관개 시설은 거의 완전하게 정비되어 있다. 특히 조선 인조 때에 건설된 전탄·북률의 경우궁보(景祐宮洑)는 오늘날까지 그 기능을 살리고 있다.

군의 곡식 산출량은 벼가 60%, 옥수수가 20%를 차지한다. 재령의 쌀 중 북률면 부근에서 산출되는 북률무사미(北栗無砂米)는 특히 유명하다. 옥수수 외에 밀·보리·수수·조 등의 밭농사 농작물도 많고, 사과·배·복숭아 등의 과일 산출량도 많다.

재령광산의 철광석은 한때 500만 톤을 채굴한 해도 있었으나, 근년에는 생산량이 격감했으며, 현재는 거의 폐광 상태이다. 교통망으로는 군의 중앙을 은율선(은파∼서해리)이 횡단하며, 재령을 중심으로 해주·사리원·안악·신천을 연결하는 도로와 함께 교통의 간선을 이루고 있다.

장수산은 ‘황해금강’이라는 이름을 가진 명산으로, 산성이 남아 있고 산중에는 묘음사(妙音寺)·채진암(採眞庵)·수양폭포(壽養瀑布)·벽암계(碧岩溪)·천장암(千丈岩) 등의 십이곡(열두구비)·현암(懸庵) 등의 명소가 있다. 현암은 120m 높이의 암벽에 걸려 있으며, 앞면 6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다.

또한 장수산은 상부 원생대의 직현통의 차돌로 된 산이며, 습곡 지형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1574년(선조 7)에 건립된 재령향교가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재건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황해도지』(황해도지편찬위원회, 1970·1982)
『한국고고학지도』(한국고고학회, 1984)
「신라하대의 패강진」(이기동, 『한국학보』4, 1976)
『지방행정구역발전사』(내무부, 1979)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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