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흥군에 둘러싸였으며, 동남쪽은 동해에 면한다. 동경 130°13′∼130°24′, 북위 42°08′∼42°25′에 위치하며, 면적 136.50㎢, 인구 3만 4390명(1944년 현재)이다.
태평로1가(太平路一街)·태평로2가·태평로3가·소화로1가(昭和路一街)·소화로2가·소화로3가·소화로4가·소화로5가·금강로1가(金剛路一街)·금강로2가·금강로3가·환산로1가(丸山路一街)·환산로2가·흥안로1가(興安路一街)·흥안로2가·흥안로3가·빈1가(濱一街)·빈2가·빈3가·빈4가·부사견1가(富士見一街)·부사견2가·부사견3가·부사견4가·부사견5가·녹1가(綠一街)·녹2가·녹3가·약초1가(若草一街)·약초2가·약초3가·산수로1가(山手路一街)·산수로2가·산수로3가·대화로1가(大和路一街)·대화로2가·대화로3가·대화로4가·원동로1가(元洞路一街)·원동로2가·원동로3가·궁동로1가(宮洞路一街)·궁동로2가·욱동로1가(旭洞路一街)·욱동로2가·욱동로3가·중동로1가(仲洞路一街)·중동로2가·중동로3가·청수로1가(淸水路一街)·청수로2가·청수로3가·금동로1가(錦洞路一街)·금동로2가·금동로3가·말광로1가(末廣路一街)·말광로2가·영동로1가(榮洞路一街)·영동로2가·영동로3가·남산로1가(南山路一街)·남산로2가·남산로3가·남산로4가·대동로1가(臺洞路一街)·대동로2가·대동로3가·금평로1가(琴平路一街)·금평로2가·금평로3가·금평로4가·금평로5가·신안(新安)·간의(間依)·신해(新海)·나진(羅津)·초도(草島)·유현(踰峴)·명호(明湖)·신수(新水) 등 80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태평로이다.
함경산맥의 북단이 북쪽에서 서북 방향으로 뻗어 있고, 산악 지대와 동해안 사이에 좁고 긴 평야가 해안선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북부의 송진산(松眞山, 1,146m)과 풍해면의 보로지봉(保老地峯, 815m), 웅기읍의 광대덕(廣臺德, 638m)을 잇는 산지가 형성되어 있다.
동남부의 나진만에는 대초도(大草島)·소초도·송도 등의 섬들이 가로놓여 천연적인 방파제를 이루며, 수심이 깊어서 부동항(不凍港)으로 이용된다. 지질은 경질화강암층으로 되어 있다.
겨울에는 북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고원 지대에 비하여 온화한 편이며, 여름에는 한류의 영향으로 서늘하다. 연평균 기온 7℃, 1월 평균 기온 -8℃, 8월 평균 기온 22℃ 내외로 여름과 겨울의 연교차는 30℃이다.
연 강수량은 800∼900㎜이며, 서리는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4월 상순까지 내리며, 안개가 많은 지역으로 연평균 안개 일수가 56일에 달한다.
[고 대]
두만강 하류의 인접지인 종성군 동관진(潼關鎭)에서 이미 오래전에 전멸된 것으로 알려진 포유동물의 화석과 세석기(細石器)·사슴뿔·골각기(骨角器) 등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1933년에 발굴되었고, 또 1963년에는 새로이 두만강 하구에서 굴포문화(屈浦文化)라고 부르는 구석기 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인접지인 웅기읍 송평동 해안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와 조개무지 등이 발견되었으므로 이 지방에도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초도·나진동·해산구미(海山九味) 등지에서 신석기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초도·관해리·대호미리·영진리 등지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조개무지 및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뒤 이 지역에서는 부여(夫餘)·예맥(濊貊)·옥저(沃沮)·숙신(肅愼)·말갈(靺鞨) 등의 부족이 활동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판도였으나 668년(문무왕 8)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 옛 땅에 당나라의 군정이 시행되었을 당시에는 그 치하에 있었으며, 그 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 시대에는 오경(五京)의 하나인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에 속하여 있었다.
[고 려]
후삼국 시대를 거쳐 고려 말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거란(契丹)·여진(女眞)·몽고(蒙古) 등에 의하여 점거되었던 지역이었다.
특히, 발해 멸망 뒤 이에서 벗어난 일부 말갈족 집단인 여진은 백두산 동북쪽에서 할거하다가 금(金)나라를 세워 약 1세기 동안 국운을 유지하였으나, 몽고에 의하여 멸망되자 두만강 유역으로부터 점차 함경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고려와 북계(北界)를 이루면서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 말엽에 조선태조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와 그 아들 행리(行里)는 원(元)나라의 지방관으로 이 지역의 여진을 다스렸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이곳은 동북면(東北面) 공주(孔州) 관하에 속하여 있었다.
[조 선]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이 동북면의 각 군·현을 분정할 때 지난날 공주라 불리던 이 지방을 경원부(慶源府)로 명칭을 고쳤고, 육진(六鎭) 개척 당시인 1437년(세종 19)에는 경원부가 분군되어 새로 경흥군(慶興郡)이 생겼을 당시에는 그 관하의 사(社)로 있었으며, 그 뒤 한때는 멀리 떨어진 온성군(穩城郡)의 해진(海津)으로 안화면(安和面) 관할이기도 하였다.
[근 대]
갑오개혁에 의하여 1895년 다시 경흥군 관하에 들어갔고 그 지명도 신안면(新安面)으로 바뀌었으며, 1921년 개항이 되었다. 1932년 북만주에 대한 종단항으로서 항만공사와 시가지 건설이 시작되면서 급격히 발전하였으며, 1934년 나진읍으로 승격되었다.
과거 일개 어촌에 지나지 않던 곳이 불과 수년 사이에 두만강 하류의 환상철도인 북선선(北鮮線)이 개통되고 항만 시설의 완성과 더불어 대륙의 최단 종단항으로 비약함에 따라 1936년에는 부로 승격되었다.
나진만의 길이는 10㎞에 달하여 1만 톤 이상의 선박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만의 입구에는 옛날 온성군 안화면 시절에 마필 목장이었던 대초도와 소초도 등 크고 작은 섬이 가로놓여 천혜적인 방파제를 이루고, 수심이 깊어 우리나라 최북단의 웅대한 부동항으로 발전하였다.
또, 만내에 자리잡은 방진포(方津浦)·유진포(楡津浦) 등은 옛날 온성군의 한미한 해산물 공급지에 불과하던 것이 지금은 나진의 어항으로 도내 북부 수산 기지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으며, 함경북도와 북만주의 관문으로서 조선·수산 공업의 중심지이며 군사 요지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나진 시가지는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구획 정리가 잘 된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1945년 당시의 호수는 8,391호, 인구는 3만 8597명에 달하였다.
선사 시대 유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나진만의 초도유적(草島遺蹟)이며,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치는 유물·유적이 수습되었다. 1949년 9월부터 발굴, 조사된 이 유적에서는 조개무지·주거지·노지·인골 및 각종 토기와 석기·골각기·청동기가 확인되었다.
그 밖에도 나진동의 조개무지를 비롯하여 소청리·관해리·대호미리·내포리·용저리 등지에서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유물·유적이 조사되어, 이 지역이 시베리아·연해주 지역의 선사 문화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북만주에 대한 종단항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1932년 이전까지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여 유물·유적의 수는 많지 않다. 다만, 연두봉 정상에 석축의 원형 봉수터가 남아 있는데 지름 150㎝, 높이 60㎝이다.
조선 시대 교육 기관으로는 경흥향교가 있었고, 각 촌락에는 한학서재가 있어서 많은 유생들을 교육시켰다. 근대 교육 기관으로는 나진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그 뒤 1940년 나진공립중학교가 설립되었으나 한국인의 취학률은 극히 적었고 주로 일본인들이 다녔다.
1945년 현재 학교 상황을 보면 유치원 2개소,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종교 기관으로는 1945년 현재 불교 포교소 2개, 천주교 성당 1개, 개신교회 2개가 있다.
이 고장에서는 〈애원성 哀怨聲〉이 많이 불렸는데, 민요의 사설은 짧지만 늦은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느리고 구슬프게 부른다. 주로 러시아나 간도로 유랑을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거나, 남도에서 함경도로 와서 유랑하는 유랑민의 애환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주된 민속놀이로는 겨울철에 석전(石戰)과 횃불놀이·윷놀이가 행하여진다. 윷놀이는 기후 관계상 실내에서만 거행되며 강낭콩에 금을 새긴 콩윷을 사용하는데, 정월 보름에는 점서(占書)에 따라 점윷으로 그해의 운수를 점치기도 한다.
동제로는 농촌의 맹수 피해와 괴질의 유행 등 재앙이 없도록 기구하는 산천제(山天祭)와, 풍어와 풍랑의 피해를 막아 보려는 어촌의 용신제(龍神祭)가 있다.
산천제는 음력 3월 초순에 촌락 내의 정결한 곳을 택하여 제관 3인이 주관하여 지낸다. 공동으로 마련한 제수 외에 마을의 각 집에서는 메 한 그릇씩을 각기 제단에 바친다. 분향배례·고축·소지의 절차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음복하며 제육은 온 마을 각 집에 골고루 분배한다.
용신제는 3월 중 길일에 큰 어선에 제단을 마련하여 돼지머리·시루떡·제주·쌀·포목 등의 제수를 마련하고 제주가 주관하여 분향·배례·헌작·고축·소지·재배의 순으로 지낸다. 무당이 참예하여 무속에 따른 굿을 곁들이는 경우도 있다.
이 지역은 산지가 많아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활발하다. 1943년 현재 총농경지는 1,315ha로 경지율은 8.5%이며, 그중 논 11.4㎢, 밭 1.74㎢이다. 따라서, 보리·콩·조·피 등의 잡곡이 주산물이다.
한편, 근해에 좋은 어장을 가져 연어·청어·대구·명태·해삼·굴 등의 해산물이 풍부하다. 상업 활동을 보면, 시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5일장이 정기적으로 열려 가축·신탄(薪炭 : 땔나무와 숯)·일용 잡화 등의 매매가 이루어졌다.
일본이 중국 대륙 진출의 야심을 달성하고자 진해·군산에 이어 나진을 군항 및 무역항으로 건설하게 되면서 1940년 시로 승격되었고, 북선선의 종점이 되고 일본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하면서 도시 개발 용도 지역으로 선정되어 최신 공법에 의한 신시가지를 형성하고 대규모의 상설 시장을 세우면서 정기 시장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나진은 민족 항일기에 동북 만주 지방과 일본 간의 수송 교통에 있어서의 가장 짧은 구간을 잇는 항구였다. 따라서, 함경북도 북부와 중국 동북 지방의 농림산물과 광물의 집산과 교역지일 뿐만 아니라 일본이 소련을 겨냥한 군항요새로서 발달하였다.
도로망은 청진∼경흥 간의 국도와 청진∼경원 간의 함경선이 동해안을 따라 시의 동남부를 통과하며, 청진으로 연결되는 항해로가 있다.
1949년 1월 나진시가 폐지되면서, 나진면(羅津面)과 풍해리, 부령군(富寧郡)의 연천면(連川面)·부거면(富居面)·삼해면(三海面)·관해면(觀海面) 등 4개 면이 통합되어 나진군이 신설되었다.
1961년 3월 신흥리·안주리가 각각 노동자구로 개칭되었고, 남창리가 부거리에 통합되었다. 1967년 8월 남부의 7개 이가 분리, 청진시에 편입되었고, 선봉군(先鋒郡)의 5개 이가 분리, 편입되어 다시 나진시로 승격하였다.
1973년 8월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하여 관곡동·인화동·동명동·안주동·남산동 신해리와 신안동 및 치경동의 일부가 통합되어 남산구역(南山區域)이 되고, 신해리가 신해동으로 개칭되었으며, 후창리·무창리·방진리·낙산노동자구·이진리·관해리·서리·삼해노동자구·노창리 등이 통합되어 관해구역(觀海區域)으로 되었다. 또, 방진리와 이진리는 각각 노동자구로 개칭되었다. 1991년 12월 나진·선봉 지역이 자유 경제 무역 지대로 설정되었고, 1993년 선봉군과 통합, 나진·선봉시가 되었다.→나진·선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