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득산(林得山)은 189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한편, 서울에서 이병철(李秉澈) · 조용주(趙鏞周) · 연병호(延秉昊) · 송세호(宋世浩) · 안재홍(安在鴻) 등이 조직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취지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여 상하이 특파원으로 세계 각국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원 특파 등의 활동 계획을 세우고 이를 지원하였다.
1919년 11월 20일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에서 독립운동 관계 문서를 발견한 일제 경찰에 의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이병철 등이 체포된 뒤 함께 입건되어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판결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직후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여하한 모험도 감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에 가입하여 폭탄 제조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폭탄을 제조하던 중 폭발 사고가 일어나 김홍식(金弘植) · 이규호(李圭鎬) 등이 체포되었다.
또한, 광복군 결사대에 편입되어 평안북도 철산(鐵山) · 용천(龍川) · 선천(宣川)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1920년 8월에는 선천경찰서 폭탄 투척에 가담하였다. 이후 상하이와 만주를 오가며 의열단에 폭탄을 제공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안동현(安東縣)의 이륭양행(怡隆洋行)에 체재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3년 6월에는 서간도(西間島)를 대표하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서울에서 부업공진회(副業共進會)가 열리게 되자 이를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폭탄 50개를 서간도의 통의부(統義府)로 발송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압수되기도 하였다.
1925년 3월 13일에는 제13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곽헌(郭憲) · 최석순(崔錫淳) · 문일민(文逸民) 의원과 함께 이승만의 탄핵안을 제안하여 5월에 불신임안이 의결한 바 있다. 1926년 1월에 재중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제 앞잡이 처단 등의 활동을 위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박창세(朴昌世)를 대장에 추대하였다.
1932년 11월 24일 의정원 의원직에서 사임하였으며, 이듬해인 1933년 1월 흥사단(興士團) 원동대회가 개최되어 원동반(遠東班)이 조직되자 신언준(申彦俊) · 문일민과 함께 제1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34년에는 임시정부가 난징〔南京〕으로 이전하자 한국독립당 난징 지부를 조직하고 이광제(李光濟) · 이치섭(李致燮) · 이동초(李東初) 등과 함께 당을 이끌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