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영관목차버튼
바로가기
내 검색어

    영관(永寬)

    불교인물

     조선후기 선암사에서 사찰의 외호(外護)에 힘을 기울인 승려.   

    확대하기축소하기프린트URL의견제시

    트위터페이스북

    의견제시
    항목명영관
    이메일올바른 형식의 이메일을 입력해 주세요.
    의견
    10자 이상 상세히 작성해 주세요.
    첨부파일
    의견제시 팝업 닫기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후기 선암사에서 사찰의 외호(外護)에 힘을 기울인 승려.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염불승(念佛僧).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최씨. 법호는 철경(鐵鏡). 어머니가 커다란 산이 옷소매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 17세에 부모의 허락 없이 선암사(仙巖寺)로 가서 재윤(在玧)을 스승으로 삼아 승려가 되었다.
    이어서 침명 한성(枕溟翰醒)에게 계(戒)를 받고 불경을 배우다가, 30세에 참선수행을 하기 위하여 태백산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잠시 쉬는 동안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어떤 승려가 “이쪽으로 가면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하는 곳을 지나게 되므로 발길을 빨리 서쪽으로 돌리라.”고 하였다.
    이에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으로 들어가서 잠깐 머물러 밤중에 종루(鐘樓)에 앉아 있는데, 한 동승(童僧)이 와서 연곡사(燕谷寺) 서쪽에 있는 굴은 기도하기가 아주 좋은 곳이라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곧 서굴(西窟)로 올라 가서 열심히 염불정진한 뒤, 32세에 다시 설악산으로 가서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된 봉정암(鳳頂庵)을 참배하고 다시 선암사로 돌아왔다. 당시 선암사는 중앙에서 먼 거리에 있어서 절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의 침탈이 심하였고, 특히 사찰림(寺刹林)은 부근 민가에서 땔나무로 베어 갔기 때문에 점점 황폐해 갔다.
    이를 보다 못하여 1866년(고종 3)에 걸어서 서울로 올라간 그는 대원군(大院君)에게 호소하였고, 그 뒤 선암사 부근의 산판에는 나라에서 제정한 봉계(封界)가 서게 되어 임야가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그 뒤에도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을 기울이다가 말년에 다른 사찰로 옮겨 쉬고자 하였다.
    그때에도 꿈에 동승이 나타나서, 여기 그대로 있어도 더 피곤하게 하지 않을 테니 딴 곳으로 가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므로, 입적할 때까지 줄곧 선암사에 머무르면서 사찰의 외호(外護)에 힘을 기울였다. 나이 70세, 법랍 52세로 입적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선맥(禪脈)』(서경보,아카데미,1978)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7년)
    김위석
    페이지 상단으로 이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