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학교 ()

영생학교
영생학교
단체
1907년 함경남도 함흥에 설립되었던 중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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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1907년 함경남도 함흥에 설립되었던 중등학교.
연원 및 변천

캐나다 기독교장로교 선교부의 한국선교사 맥레(Macrae,D.M., 馬求禮)가 그 해 4월에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의 명칭은 영생학교였으며, 1910년 8월에 영생중학교로 정식 인가되어 초대 교장에 영(Young,L.L.)이 취임하였다.

1911년 3월에 김호(金鎬) · 김태석(金台錫) · 김대벽(金大闢) · 이준필(李俊弼) · 이진명(李鎭明) 등 제1회 졸업생 5명을 배출한 이래 1912년에 10명, 1913년에 6명, 1914년에 5명, 1915년에 9명을 배출하였다.

1915년에 공포된 <개정 사립학교령>으로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들에 대한 성서교육 철폐 요구 등의 탄압이 가해짐에 따라, 교명을 영생학교로 바꾸고 각종학교로 자진 격하했다. 1922년부터는 캐나다 선교부의 단독 운영에서 한국인 교회와의 공동운영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러나 성서교육을 양보하는 고등보통학교로의 인가와 자유로운 기독교 교육을 위한 지정학교의 고수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던 중, 1928년에 인가학교의 방침을 굳히게 되어 1931년 3월에 영생고등보통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한편, 1911년에 지은 교사가 1922년 화재로 전소되어 신창리 교회당을 임시 교사로 사용하였으며, 1924년에는 원산보광학교 · 성진보신학교를 합병하였다. 1925년 함흥 운흥리에 교사를 신축하고 수업연한을 5년으로 개편하였다. 1935년에는 교회와 일반 사회의 기부금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1937년부터 일제의 학원 탄압이 더욱 가중되어 교명을 다시 영생중학교로 개칭하였으며, 한때는 ‘영생’이라는 교명을 빼앗기고 ‘히노데(日出)’라는 일본식 교명을 사용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함흥지역의 시위운동을 주동하여 대대적인 함흥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많은 졸업생들이 주동자로 투옥되었으며, 그 중 7회 졸업생 조영신(趙永信)은 고문으로 순절하였다. 또한 광주학생운동 직후인 1930년 1월에는 재학생들이 함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영 앞까지 돌진하여 만세시위를 벌일 만큼 항일 독립정신이 강하였다.

1924년에는 학생 205명, 교사 10명, 1931년에는 학생 265명, 교사 16명, 1937년에는 학생 426명, 교사 20명에 이르렀다. 이 학교는 1903년에 설립된 영생여학교와 함께 북동부지방의 교육문화 진흥과 민족의식 고취에 이바지한 바 컸으나, 국토 분단과 함께 선교단의 철수로 폐교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함경남도지』(함경남도지 편찬위원회, 1968)
『한국근대교육사』(손인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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