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문환 ()

개신교
인물
일제강점기 평양기독교친목회장,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교육자.
이칭
이칭
남파(南坡), 松浦文雄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3년 4월 13일
사망 연도
1962년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평양기독교친목회장, 기독교신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교육자.
생애 및 활동사항

1903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미국인 선교사 모펫(S.A.Moffett)에게서 영어를 배웠다. 1923년 3월 숭실중학교와 1925년 3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직후부터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1923년 『조선기독교사의 분수령인 평양양란(平壤洋亂)』을 저술해 토마스(Thomas, R. J.)목사를 연구했고, 1926년 토마스목사순교60주년기념식을 승동교회에서 거행하는 동시에, 1927년 5월에는 토마스목사순교기념전도회를 조직, 총무가 되었다. 1928년에 『토마스목사전』을 저술하고, 토마스 목사순교기념교회당을 그의 묘지부근인 조양리에 건립했다. 1935년에는 토마스호를 건조하여 대동강 하류와 연평도에 이르는 해상전도에 사용했다. 그러나 「치안유지법」에 저촉된다는 이유로 검속되어 전도사업이 중단되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장로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4월 평양기독교친목회를 조직, 회장이 되었다. 이 단체는 신사참배 지지와 선교사 배척을 주장한 친일단체였다. 같은해 12월 평양지역의 유력한 목사와 장로 등 12명을 인솔하여 북중국지역의 일본군을 위문했다. 1939년에는 『비상시국과 기독교』를 저술했고, 1940년 6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기관지인 『총동원』에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회전」을 기고했다. 같은해 12월에는 '기원 2600년 봉축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총무가 되었다. 1942년 1월 재단법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의 이사, 4월에는 기독교신문협회의 이사가 되었다. 또한 6월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대표로 일본군에 자동차 2대를 헌납했다.

해방 후 경성일보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고, 1946년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상임고문이 되고, 1948년에는 기독공보를 맡아 운영했으며, 1949년에는 한국일보를 인수했다. 1946년에는 숭문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서울 수복 후에는 광신상업고등학교를 재건했으며, 1958년 학교법인 계명의숙을 설립, 장안중학교와 남산고등학교를 재건했다. 해방 이후에도 전도사업을 계속하여 1951년에 150t급의 제2복음선 토마스호를 건조해 도서지방의 전도에 주력함으로써 71개 처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주요저서로 『사적탐방교회순례기』·『윌리엄스박사전』 등 다수가 있다. 1962년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장로교회사』(손병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교육부, 1982)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한국교회사학사 편, 연세대학교, 1968)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록』
『조선총독부관보』
『총동원』(2-6, 1940)
「오문환의 『도마스牧師傳』과 토마스의 ‘순교' 문제 검토」(한규무, 『한국기독교와 역사』45, 2016)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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