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성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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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홍범도(洪範圖) · 서일(徐一) · 최진동(崔振東) · 양하청(梁河淸) 등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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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0년홍범도(洪範圖) · 서일(徐一) · 최진동(崔振東) · 양하청(梁河淸) 등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전투.
내용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의 독립군들은 한층 사기가 고무되어, 그 해 8월부터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입작전을 종종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겨울이 다가오자, 각 독립군 부대는 두만강 결빙기를 틈타 대규모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3월 15일부터 27일까지 10여 일 동안 소규모로 편성된 독립군은 여러 차례 두만강 대안의 온성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격파시켰다.

3월 15일 200여 명의 독립군이 온성군 유포면의 풍리동·세선동으로 진입, 풍리동 일본군주재소를 공격, 약 1시간 동안 격전을 벌였다.

같은 달 17·18일 양하청의 독립군 50여 명은 온성군 미포면의 월파·장덕·풍교·미점 등으로 진격하여, 일본군헌병감시소를 습격, 전멸시키고 전신·전화 등의 시설을 파괴하여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18일에는 30여 명의 독립군이 유포면 향당동으로 진출하여 일본경찰대와 교전을 벌였다. 또한 다른 200여 명의 독립군 일대는 온성면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27·28일 양일간에는 50여 명의 독립군이 두만강 상류의 유포면 남양동 방면으로 진입하여, 일제군경과 20여 분간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독립군 공격에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던 일본군경에 퇴각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국내진입작전은 막강한 무력을 갖춘 일본군을 상대로 수비전이 아닌 공격전을 펼쳤다는 데 의의가 크다 하겠다. 특히 온성전투는 만주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신경을 자극시켜, 그 해 6월 독립군전투사상 일대승첩인 봉오동전투를 유발시킨 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재발굴(再發掘)한국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윤병석, 한국일보사, 1987)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집필자
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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