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상 ()

이진상
이진상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학종요』, 『사례집요』, 『묘충록』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여뢰(汝雷)
한주(寒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8년(순조 18)
사망 연도
1886년(고종 23)
본관
성산(星山)
출생지
경상도 성주
주요 관직
성균관생원
관련 사건
서원철폐령|운요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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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이학종요』, 『사례집요』, 『묘충록』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 아버지는 이원호(李源祜)이며, 경상도 성주 한개[大浦]에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8세 때 아버지로부터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웠고, 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다 읽고 경사(經史)·정무(政務)·문장(文章)·제도(制度)로부터 성력(星曆)·산수(算數)·의방(醫方)·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다 알려 했다 한다.

그러나 17세 때에 숙부 원조(源祚)의 교훈으로 성리학에 전념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몰두하였다. 또한 선유(先儒)들의 초년학설과 만년학설을 구별, 이해하려고 노력해 학문이 날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두고 15, 16세 때부터 대과책문(大科策文)을 짓기 시작해 차츰 국내에서 손꼽히는 책문가(策文家)로 알려졌다. 이에 그가 지은 「동방공부책(東方貢賦策)」과 「경의(經義)」 1편이 당시 거자(擧子: 과거를 보려는 선비)들 사이에서 송습(誦習 : 외우고 익힘.)되었다 한다.

1849년(헌종 15)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생원이 되었으나 대과는 포기하였다. 1857년(철종 8) 청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대의 예를 철폐하자는 취지로 상소문을 지었으나 올리지 않았다. 1862년 삼남 전역에 민란이 터져 조정에서 삼정문란(三政紊亂)의 대책을 묻는 윤음(綸音)이 발표되자 「응지대책(應旨對策)」을 올렸으나 왕의 비답을 받지는 못하였다.

1866년에는 국가제도의 이상적 개혁안을 제시한 『묘충록(畝忠錄)』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1871년에는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으며, 1876년에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의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고 계획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그만두었다.

당시 천주교 전파와 서양과의 통상을 우려해 척사의 취지에서 『대학(大學)』과 『심경(心經)』을 자주 강론하였다. 그리고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에서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가져오자 척사의 뜻으로 글을 지어 고을에 돌리기도 하였다. 명성이 날로 높아지자 67세에 나라에서 유일(遺逸: 과거를 거치지 않고 높은 관직에 등용될 수 있는 학덕이 있는 인물)로서 의금부도사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조운헌도재(祖雲憲陶齋)’라는 거실의 편액(扁額)이 말해주듯이 주자(朱子)와 이황(李滉)의 주리론(主理論)을 주축으로 해 형성되었다.

주자의 경우에는 학설을 초년설과 만년설로 구별해 초년설을 부정하고 만년설만 받아들였다.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도 궁극적으로 이발일도(理發一途)만을 인정했으며,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에도 심(心)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제창해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23세 때 이미 「이단설(異端說)」을 지어, 이단의 학설이 백갈래, 천갈래 길이 있지만 시초는 모두 인기(認氣)에서 연유했고, 끝내는 모두 주기(主氣)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특히 우리 나라 서경덕(徐敬德) 일파가 호학(湖學)의 입맥으로 되어 점차 주기의 세를 이루었다고 지적해 우려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는 연역법에 가까운 순추(順推)와 귀납법에 가까운 역추(逆推)라는 독특한 논리를 썼고, 도간(倒看)·횡간(橫看)·수간(竪看)이라는 3단계 인식방법을 제시하였다. 도간은 감각적 인식과 유사하고, 횡간은 경험적 인식과 비슷하며, 수간은 논리적 인식과 같았다. 따라서, 먼저 역추하지 않으면 순추가 불가능하고, 도간과 횡간을 거치지 않으면 수간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는 주기론이 도간과 횡간의 역추에만 의존한 채 사물을 거꾸로 인식해 목전의 구체적인 형이하자(形而下者)만 인식하고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부정한 데 대해, 자신은 도간과 횡간의 역추를 통해 형이하(形而下)의 실상을 인식하고 다시 수간의 순추를 통해 형이상(形而上)의 진리를 인식하려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도간과 횡간의 역추는 수간의 순추를 위한 출발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주장한 주리설에 의하면 천지간에 가득차 있는 것은 모두 음양(陰陽)의 기(氣)이지만, 기가 변하는 까닭은 태극(太極)의 이(理)가 주재(主宰)하기 때문이다. 태극은 형체가 없지만 만물이 생겨나기 이전에 존재해 유형(有形)의 기(氣)가 존재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나, 무위(無爲)가 아니라 모든 변화의 근본이며 만물의 근저(根柢)이다.

이미 태극이 있으면 동정(動靜)이 있게 되고 동정이 있자마자 곧 음양이 나누어진다. 태극의 동정은 음양이 생겨나는 기(機)이어서 동(動)은 양(陽)이 생겨나는 기이고, 정(靜)은 음(陰)이 생겨나는 기이다. 일단 이(理)가 기(氣)를 생(生)하면 이는 기 속에 있어 동해도 함께 동하고 정해도 함께 정하지만 이가 동정의 주(主)이고 기는 동정의 자(資)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말[馬]을 타고 출입함과 같아서, 사람과 말이 함께 출입하지만 사람이 출입의 주(主)이고 말은 출입의 자(資)임과 같다. 만약, 기에만 동정이 있고 이에는 동정이 없다면, “졸고 있는 사람을 배로 비유한다면, 없는 배를 빌려 타고 배가 가는 대로 방임해 간섭하지 않음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기가 함께 동하고 정하지만 기는 동하면 정하지 못하고 정하면 동하지 못하는 데 대해, 이는 동중(動中)에도 정이 있고 정중(靜中)에도 동이 있어서 동하다가도 능히 정하고 정하다가도 능히 동한다.

이는 선후(先後)나 생멸(生滅)이 없지만, 기는 선후가 있고 생멸이 있다. 이는 통(通)해 있고 기는 국(局)해 있다. 이는 무형하지만 기를 생하여 기에 의탁해 있다. 따라서, 이가 먼저 있고 기가 뒤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가 일단 기를 생하면 이가 기 속에 있게 되어 이와 기는 서로 떠나지 못하며, 또한 서로 섞이지도 못해 어디까지나 이물(二物)이다. 이가 기를 생하면 음양이 합변(合變)해 수화금목토(水火金木土)의 오행(五行)이 생겨난다.

이가 음양오행의 기 가운데 있게 되면 양(陽)에서는 건(健)으로 음(陰)에서는 순(順)으로, 목(木)에서는 인(仁)으로, 화(火)에서는 예(禮)로, 금(金)에서는 의(義)로, 수(水)에서는 지(智)로, 토(土)에서는 신(信)으로 달라진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하늘에 있으면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였다. 하늘이 음양오행의 기로써 만물을 화생(化生)해 이(理)를 부여하니 이 이가 만물의 성(性)이다. 따라서, 성은 곧 이이며 만물이 모두 인의예지의 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맹자(孟子)가 말한 성선설(性善說)의 성(性)이고 송대(宋代)의 본연지성(本然之性)이다. 성(性)이 발(發)하지 않고서는 기(氣)가 용사하지 아니해, 일리(一理)의 성(性)이 순수지선(純粹至善)하지만 이발(已發)의 즈음에 기질(氣質)이 용사해 기질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기질의 청수(淸粹)함이 극(極)하면 기가 이에 순응해 발함을 돕지만, 기질의 박탁(駁濁)함이 심하면 기가 이를 끼고서 일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기(氣)에는 또 편전청탁(偏全淸濁)이 있어서 전기(全氣)와 편기(偏氣)중 어느 것을 타고났는가에 따라서 사람과 만물이 구별되고, 편기와 전기에 각각 청탁수박이 있어서 전기를 타고난 사람도 청탁수박에 따라 지우현불초(智愚賢不肖)로 나누어진다.

본연지성이 기질의 청탁편전의 작용으로 기품(氣稟)에 따라서 달리 나타나는 것이 기질지성(氣質之性)이다. 본연지성은 기질의 우리[囿]안에 있고, 그 용사함을 타고서 발한다. 본연지성은 기질을 떠나지 못하지만 또한 기(氣)와 섞이지도 아니한다. 본연지성은 미발(未發)의 체(體)이고 기질지성은 이발의 객용(客用)이다.

정(情)은 이발의 성(性)이다. 성은 미발의 이(理)이고, 정(情)은 이발의 이이다. 성이 발해 정이 되지만 단지 일리(一理)일 뿐이다. 마치 주인이 나가면 손님이 되지만 단지 일인(一人)일 뿐이다. 따라서, 이발(理發)은 있어도 기발(氣發)은 없다.

대개 사람이 형기(形氣)가 있는 한 사(私)가 없을 수 없으니, 귀의 사는 소리이고 눈의 사는 색(色)이고 코의 사는 냄새이고 입의 사는 맛이고 사체(四體)의 사는 안일이다. 성(聲)·색(色)·취(臭)·미(味)·궁실(宮室)·여마(輿馬)·복용(服用) 등 형기의 사에 속한 것이 밖에서 닥치면 심(心)의 영(靈)이 동하는데, 지각(知覺)이 형기에 따라가면 인심(人心)이다.

그러나 군신(君臣)·부자(父子)·장유(長幼)·부부(夫婦)·붕우(朋友) 등 천성에 속한 일이 밖에서 닥치면 심의 영이 동하는데 지각이 의리(義理)를 따라가면 도심(道心)이다. 심(心)에서는 본체(本體)·형체(形體)·묘용(妙用)·객용(客用)이 있다.

인의예지의 순수지선한 것은 본체이고, 겉이 둥글고 가운데에 구멍이 있어 허명정통(虛明正通)한 것은 형체이고, 사단(四端) 칠정(七情)이 물(物)에 감(感)해 응함은 묘용이고, 쓸데없는 생각과 인욕(人欲)을 따라서 치탕(痴蕩)함은 객용이다.

본체가 없으면 심이 귀하다 할 것이 없고, 형체가 없으면 심이 풍영(風影)과 같아 머물 데가 없다. 묘용이 있기 때문에 사공(事功)이 일어나고 사람의 도리를 닦지만, 객용이 없지 않기 때문에 성(聖)과 광(狂)이 나누어지고, 사람과 금수가 판연하다.

묘용은 본체에 근본해 성정(性情)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객용은 형체에서 일어나서 기질의 폐로 되었다. 따라서, 형체는 심이라 하지 않으며, 객용은 반드시 막아서 그치게 한다. 본체는 성(性)이고 묘용은 정(情)이다. 심(心)을 논할 때에는 심즉리(心卽理)라는 표현보다 나은 것이 없고 심즉기(心卽氣)라는 표현보다 나쁜 것이 없다.

심즉기설은 근세 유현(儒賢)이 주장한 이래 세상 사람이 따르고 있으며, 심즉리설은 왕양명(王陽明)이 주장한 이래 누구나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도 심즉리라 함은 무엇 때문인가? 옥(玉)은 보물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돌을 옥이라 하는 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형산(荊山)의 옥은 돌 가운데에 싸여 있어 오직 변화(卞和)만이 옥인 줄을 알고 여왕(勵王)에게 바쳤지만, 옥공(玉工)이 겉의 돌만 보고 속이 옥인 줄을 알지 못해 돌이라고 대답하였다. 조정(朝廷)에서 약간 옥과 돌을 구별할 줄을 아는 사람은 모두 돌이라고 했지만, 오직 저 옛날 돌을 옥이라 하던 자만이 옥이라 주장한다면 이 사람이 어찌 참으로 옥인 줄을 아는 것이겠는가? 그가 옥이라 함은 돌이라 함과 마찬가지이다.

유현이 심을 기(氣)라 함은 옥공이 돌이라 함과 같고, 왕양명이 심을 이(理)라 함은 돌을 옥으로 아는 자가 옥이라 함과 같다. 심을 이 또는 기라 함은 모두 기만 보고 이를 보지 못했음은 마찬가지이다. 변화가 돌 속에 있는 옥을 다만 옥이라고 했다가 여왕으로부터 다리를 잘리게 되었지만, 만약 옥과 돌이 합해져 있다고 말했더라면 다리를 잘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황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에서 심(心)은 합리기(合理氣)라고 하면서도 중도(中圖)에서는 이(理)만 단지 가리켰다. 심이 합리기라 함은 옥과 돌이 합해져 있다 함과 같다. 이(理)만 지적한 것은 소용이 명백히 옥에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따라서, 돌 속에 싸인 것은 진옥(眞玉)이고 기 가운데 있는 이는 진심(眞心)이다. 심(心)은 통성정(統性情)이어서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고, 성과 정을 주재한다. 그는 이(理)를 소이연(所以然)·소능연(所能然)·소당연(所當然)·자연필연(自然必然)의 네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문집으로는 1895년(고종 32) 거창의 정천(井泉)에서 간행한 49권 25책의 목주자본(木鑄字本)과, 1902년 성주의 삼봉서당(三峯書堂)에서 간행한 22책의 개정판의 양본이 있다.

문집 이외에 별저로서는 『이학종요(理學綜要)』 22편 10책, 『사례집요(四禮輯要)』 16편 9책, 『묘충록』 2책, 『춘추집전(春秋集傳)』 20편 10책, 『춘추익전(春秋翼傳)』 3편 3책, 『천고심형(千古心衡)』 상하 2책, 『직자심결(直字心訣)』 상하편 1책, 『구지록(求志錄)』 23책, 『변지록(辨志錄)』 4책이 있어 문집까지 합하면 총 저서는 85책이나 된다.

문인으로는 곽종석(郭鍾錫)·허유(許愈)·이정모(李正模)·윤주하(尹胄夏)·장석영(張錫英)·이두훈(李斗勳)·김진호(金鎭祜) 등이 유명하다.

참고문헌

『한주전서(寒洲全書)』
『한주전서해제(寒洲全書解題)』(송찬식, 한국학문헌연구소, 1980)
집필자
송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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