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준 ()

구비문학
인물
조선 후기, 형조 판서, 예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75
사망 연도
1842
본관
한산
출생지
서울 서대문 밖 평동
주요 관직
형조판서, 예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내용 요약

이희준은 조선 후기 형조 판서, 예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인이다. 이태영과 유한갈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0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 참판을 위시하여 1840년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애초 이희준은 국문학 연구 초기에 『계서야담』과 『계서잡록』의 작가로 알려졌지만, 이는 잘못된 정보다. 『계서야담』은 작자 미상이며, 『계서잡록』의 작자는 이희준이 아닌 그의 형인 이희평이다.

정의
조선 후기, 형조 판서, 예조 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여(平汝)다. 목은 이색의 22세손으로, 고조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이집(李潗), 증조는 호조 정랑을 지낸 이병건(李秉健)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정을 지낸 이산중(李山重, 1717-1775)이고, 할머니는 당시 좌의정을 지낸 조태채(趙泰采)의 딸이다. 아버지는 이태영(李泰永)이고, 어머니는 목사를 역임한 유한갈(兪漢葛)의 딸(1744-1781)이다. 뒤에 친척 이현영(李顯永)에게 입양되었다. 혜경궁 홍씨와 외6촌이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05년(순조 5)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09년(순조 9) 주1에 올랐다. 1825년(순조 25) 예부승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주3되었으며 1827년(순조 27) 이조 참판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 경기 감사로 부임하여 칙수불부(勅需不敷)·우역조폐(郵驛凋弊)·환곡모축(還穀耗縮)의 세 가지 병폐를 상소하여 윤허를 얻기도 했다. 경기 감사의 임기가 찼으나 주전 사업(鑄錢事業)이 막 펼쳐졌기 때문에 계속 감사직을 하다가 1832년(순조 32)에 물러났다.

1833년(순조 33) 경기 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주전 통용의 폐해에 대한 계(啓)를 올려 삼사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당했다. 이듬해 신위(申緯)와 함께 풀려났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자, 고부 겸 주청부사(告訃兼奏請副使)로 중국에 갔다.

1837년(헌종 3) 주2주4으로 가자되었고, 공조 판서에 올랐다. 1838년(헌종 4)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중국에 갔으며, 형조 판서 · 예조 판서를 거쳐 1840년(헌종 6)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저술 논란

이희준은 시문에도 능했다. 한편 국문학 연구 초기에는 『계서잡록』과 『계서야담』을 동일한 책으로 보아, 그 작가를 이희준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정보다. 계서(溪西)는 이희준의 호가 아니라, 그의 형인 이희평(李羲平)의 호다. 이희준은 이 책들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계서잡록』의 편자는 이희평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선책보(古鮮冊譜)』
『국조방목(國朝榜目)』
『철종실록(哲宗實錄)』

단행본

조희웅, 『조선후기 문헌설화의 연구』(형설출판사, 1980)

논문

김준형, 「19세기 야담 작가의 존재 양상 : 계서 이희평론」(『민족문학사연구』 15-1, 민족문학사학회, 1999)
이강옥, 「야담의 전개와 경화세족」(『국문학연구』 21, 국문학회, 2010)
임완혁, 「이조후기 3대야담집의 편찬의식」(『퇴계학과 한국문화』 35-1,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4)
주석
주1

한림의 인원이 부족할 때에 충원하기 위해 치렀던 특별 시험.

주2

임금의 삼년상을 마친 뒤에 그 신주를 태묘에 함께 모시던 일.

주3

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주로 행하였다.

주4

조선 시대에, 종묘 제향 때에 세 번째 술잔을 올리는 일을 맡아보던 제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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