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천을 두고 월성의 남쪽에 위치한 전(傳)인용사지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위한 원찰로 알려진 유적이다. 처음 김인문을 위해 절을 짓고 그의 귀국을 바라는 관음도량을 열었다가 그가 죽자 명복을 비는 미타도량으로 고친 것 같다. 절의 창건연대는 김인문의 생몰연대(628~694)를 고려할 때 늦어도 7세기 말엽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인용사의 위치에 대한 맨 처음 언급은 1916년 조선총독부 발행 경주지도에 처음 보이며 인왕사지로 표기되어 있었다. 1931년 당시 경주고적보존회 회원이었던 오사카 긴따로[大坂金太郞]는 인왕리에 있는 이 유적을 인용사지라 명명하였다. 그는 지명인 인왕리와 『삼국유사』 기록에 보이는 인용사간의 발음상의 유사성으로 기왕의 인왕사지를 인용사지로 추정하였다. 이후 연구자들은 그의 견해에 따라서 이곳을 인용사지로 추정하였으나, 사찰의 명칭을 전하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2016년에 사적 제533호 경주 인왕동 사지(慶州 仁旺洞 寺址)로 지정명칭을 바꾸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발굴조사 결과에 의하면 삼국시대 말을 전후한 시기에 창건되어 통일신라 말까지 경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조선의 단편적 유구와 유물의 존재는 주변의 민간인 거주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가람은 동·서 석탑지 2기를 중심으로 북쪽에 금당지, 좌우에 동·서회랑지가 배치되어 있다. 남쪽에 중문지와 장방형의 연지 2곳이 차례로 조영되어 있다. 그 밖에 유구중 주목할 만한 내용은 와적기단의 존재이다. 이곳의 와적 기단 구축은 당시 신라 왕경에서도 백제와 동일한 방법이 채택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유적의 변천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1기는 와축기단건물지를 비롯한 7세기 전반경의 삼국시대 건물지가 분포하고 있으며 고식단판수막새가 공반된다. 2기는 통일 이후인 7세기 말엽에서 8세기 전반까지로 추정 목탑지 등 다수의 유구가 흩어져 분포하고 있다. 3기는 사찰건물지군이 조성된 시기로 8세기 후반경에 2기의 유구들을 일시에 폐기하고 사찰을 조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3기는 사찰의 확장과 관련하여 두 시기로 세분할 수 있다. 확장의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기존 사역의 서편으로 20m 가량 확장하여 사역경계 담장과 부속건물 등을 새로이 축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