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익(鄭寅翼)이 창간하였다. 사장은 정인익, 발행인 · 편집인 겸 주필은 정진석(鄭鎭石)이 맡았다. 후에 신익희(申翼熙)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의 신문들은 대부분 공산주의자들의 ‘진보적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에 치우쳤는데, 이 신문도 좌익계열과 동조하여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이러한 논조로 말미암아 1946년 5월 14일 독립전취국민대회(獨立戰取國民大會)에 참석하였던 우익청년단체의 습격을 받아 주조기 5대를 분실당한 것을 비롯하여 다섯 차례나 피습당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인 미군정 『조사월보』에서는 이 신문의 논조경향을 중립으로 보고 있다. 1949년 7월 7일에는 호역(虎疫 : 콜레라)기사를 다루어 서울시 당국의 고발로 정인익 · 정진석 등이 구금되기도 하였다.
6·25 때 정인익이 납북당하고 1952년 5월 26일 폐간되었다. 그 뒤 1953년 9월 7일백남일(白南一)이 종로구 서린동에서 『자유신보(自由新報)』라는 제호로 『자유신문』의 속간형식으로 발행하였다.
이때의 편집진은 사장 백남일, 부사장 이상협(李相協), 고문 최남선(崔南善), 편집국장 심정섭(沈貞燮), 주필 김석길(金錫吉) 등으로, 창간사에서 ‘자유 · 희망 · 약진’을 강조하면서 국민전체의 대변지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뒤 다시 『자유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고 발행인 겸 편집인도 김갑린(金甲麟)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재정을 지원하던 태창방직(주)이 침체되자 경영난에 부딪쳐 1961년 4월 6일부터 휴간하다가, 8월 6일 폐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