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

근대사
단체
1924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운동단체.
정의
1924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조직되었던 무정부주의운동단체.
설립목적

1919년 3·1운동 후 국내외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런데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이회영(李會榮)은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운동의 구심점은 있어야 하겠지만, 정부형태일 필요는 없다고 하여 찬동하지 않았다. 그는 행정체제로서의 정부가 아니라 각 계열의 각파가 협력할 수 있는 연합기관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23년경부터 이회영은 신채호(申采浩)·유자명(柳子明)·이을규(李乙奎)·이정규(李丁奎)·정현섭(鄭賢燮) 등과 자주 만나 민족의 자주독립과 미래의 새나라 건설에 대한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런 가운데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한 사회가 장차 세워져야 할 조선의 이상적 모습으로 뚜렷이 부각되었다. 마침내 이들은 1924년 4월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백정기(白貞基)도 일본을 거쳐서 이들과 합류하였다.

기능과 역할

기관지로는 석판(石版) 순간지(旬刊誌)인 『정의공보(正義公報)』를 발행하였는데, 무정부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주의 진영내의 잘못된 생각들을 비판하며, 독립운동을 정도(正道)로 이끌어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표방하는 볼셰비키혁명이론을 비판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사도(邪道)와도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의공보』는 이회영을 주간으로 하여 9호까지 발행하였으나 자금난으로 휴간되고 말았다.

그 뒤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이 결성되어 1928년 8월 상해에서 『탈환(奪還)』이라고 이름을 고쳐 기관지를 속간하였다.

이후 1928년 상해에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 독립운동전선을 국제적 규모로 확대하였다. 또 만주로 이동한 연맹원은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만주사변 등으로 상해로 철수한 아나키스트를 규합해 1930년에는 전시체제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다시 조직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4월 신현상(申鉉商)·최석영(崔錫榮) 등이 국내에서 자금을 모금해오자 연맹은 앞으로의 운동방침을 논의하기 위하여 북경에서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일본경찰이 회의석상을 급습하여, 10여 명의 회원을 체포함으로써 이후 연맹의 활동은 침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이회영 평전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김삼웅, 책보세, 2011)
『한국 아나키즘운동사』전편(前篇)(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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