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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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출현하여 미래국토를 실현하고, 지복의 터전을 이룩한다는 민간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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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씨 성을 가진 진인이 출현하여 미래국토를 실현하고, 지복의 터전을 이룩한다는 민간신앙.
내용

조선 후기에 널리 만연한 이 신앙은 <감결 鑑訣>·≪징비록 徵秘錄≫·≪감인록 鑑寅錄≫ 등에 나타나는 ‘이망정흥(李亡鄭興)’의 예언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 및 신종교운동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정감록신앙은 봉건체제의 해체기에 들어선 조선 후기에 형성된 우리 나라 고유의 민간신앙 내지 민중적 이데올로기이다. 그 사상적 연원은 멀리 고대 중국의 자연철학적 우주론이나 정치적인 역성혁명(易姓革命) 이론에서 비롯한다.

자연철학의 우주론이란 음양오행·복점(卜占)·역수(曆數)와 관련된 것으로, 인간계와 자연계 사이에 개재하는 법칙성을 이론화한 것으로서 운세설(運世說)이라고도 한다. 특히 왕조의 흥망성쇠는 이 운세관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는 믿음이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사상은 전한(前漢)동중서(董仲舒)의 ≪헌책 獻策≫에 나오는 ‘천인상여(天人相與)’ 및 ‘재이설(災異說)’로써 확고하게 주술적이며 신비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여기에 참위설(讖緯說)이 가미됨으로써 미래국토에 대한 대망사상은 뚜렷한 민간 전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참(讖)’이란 은어를 가지고 길흉을 예정하는 것으로 일종의 예언을 말하며, ‘위(緯)’란 수직적인 경(經)에 대한 수평적인 횡(橫)을 뜻하여 경서(經書)의 비정통적 해석을 의미한다.

본래 참과 위가 별개의 뜻을 가진 것이었으나 후한(後漢) 때 장형(張衡)에 의해 참위설이 성립되었다. 그리하여 경서에 담긴 뜻이 비정통적으로 해석되는 동시에 신비적인 재이나 점성(占星)과 결부되어 주술적인 예언사상을 낳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참위설은 이미 삼국시대에 우리 나라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가 망할 무렵인 의자왕 때 나라 안에 여러 가지 변이(變異)가 생길 것이라는 망참(亡讖)이 나돌았다고 한다. 한편,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왕조의 기업을 연장하려는 의도에서 도선(道詵)의 신비적인 지리설과 비기(秘記)를 중요시 한 까닭에 도참사상(圖讖思想)이 널리 유행하였다.

따라서 참설이나 예언설이 반드시 사회적 변혁기에 나타나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국도(國都)의 복정(卜定)과 관련되어 묘청(妙淸)의 난 등이 일어난 것은 참위설의 한국적 변용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적 변용이란 참위설에 풍수지리설이 결부되어 왕도(王都)의 택정과 관련된 왕조의 흥망성쇠를 예언하는 독특한 형태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풍수(風水)란 원래 음양오행설을 근간으로 하여 방위나 지리적 조건과 관련된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예점(豫占)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개인적 수준의 음택(陰宅)이나 양기(陽基)의 풍수지리에 그치지 않고 국도의 복정에 적용되는 현상은 고려시대 이래의 유제(遺制)이며, 여기에 민간 수준에서 기성 왕조의 망참과 연관되는 것이 조선시대부터 비롯하여 정감록신앙의 근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요컨대, 참위설이 시간적 투영이라고 한다면, 풍수지리설은 공간적 투영이라고 볼 수 있다.

정감록신앙의 골자는 ① 삼절운수설(三絶運數說), ② 계룡산천도설(鷄龍山遷都說), ③ 정성진인출현설(鄭姓眞人出現說)로 요약할 수 있다.

삼절운수설이란 이씨왕조가 내우외환에 의해 세 번이나 단절될 운수를 맞는다는 말세 운수의 예언으로 그 처방을 밝힌 것이며, 도선설·무학설(無學說) 또는 경주이선생결(慶州李先生訣)·이토정가장결(李土亭家藏訣) 등의 여러 설을 종합한 것이다. 물론 그 근거는 합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음양설에 의해 설명되고 있는바, ≪정감록≫의 <감결>에는 삼절운수설을 다루지 않고 단지 임신기병설(壬申起兵說)만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다른 비결서와 다르다.

현존하는 여러 가지 감결류(鑑訣類) 가운데 ≪정감록≫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보이므로 앞으로 일어날 일만 예언했기 때문에 삼절운수설을 채택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므로 임신기병설이라는 일설에 따르면 최제우(崔濟愚)가 ≪용담유사 龍潭遺詞≫에서 표현한 “임진왜란 때는 이재송송(利在松松)하고, 가산정주(嘉山定州) 때는 이재가가(利在家家)”라는 구절과 관련하여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삼절운수란 대체로 첫째는 임진왜란을 뜻하고, 두번째는 병자호란, 세번째는 앞으로 반드시 일어날 숙명적인 국가사회의 위기라는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위기 때마다 파자(破字)풀이 내지 은유의 방법으로 그 대책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파자풀이는 이미 정여립(鄭汝立)의 난 때 ‘목자망(木子亡) 존읍흥(尊邑興)’이라는 참언이 나돈 것으로 유명하거니와, 임진왜란 때는 “살아자수 화인유여(殺我者誰 禾人有女)(倭)요, 활아자수 십팔공(活我者誰 十八公)(松)”이므로 “이재송송”하다고 했거니와, 이것은 당시에 활약한 명나라 장수들의 이름인 이여송(李如松)이나 이여백(李如栢)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 병자호란 때는 “살아자수 우하횡산(殺我者誰 雨下橫山)(雪)이요, 활아자수 시착관(活我者誰 豕着冠)(家)”라 하여 “이재가가”라고 하였는바, 이것은 병자호란이 세모(歲暮)의 동란이므로 전쟁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는 동사자(凍死者)가 많았다는 점에서 재가자(在家者)가 오히려 화를 면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는 설이 있다.

왜란과 호란을 통해서 터득한 피란의 지혜를 거울삼아 삼절운수의 마지막으로 닥치는 화를 면할 수 있는 비결은 “살아자수 소두무족(殺我者誰 小頭無足)(黨)이요, 활아자수 신입혈(活我者誰 身入穴)(窮?)”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黨’이라 함은 조선 후기에 극성을 이루는 사색분당(四色分黨)을 뜻한다는 해석이 유력하거니와, 정치 분쟁으로 희생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어느 당파에도 연루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것, 즉 은둔자로서의 신입혈이 가장 합당한 보신책이라는 비결과 관계된다는 설이다. 한편, ‘窮’자는 가난하다는 뜻도 되거니와 항산(恒産)이 없으면 오히려 난세에도 처신하기가 쉽다는 풀이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窮’자가 ‘弓弓’의 음사(音寫)라는 점에서 ‘이재궁궁(利在弓弓)’이라는 감결이 크게 유포된 것이다.

그런데 ‘弓弓’은 성리학에서의 최고 범주인 태극(太極)의 모양을 본뜬 것이므로 ‘利在弓弓’이나 상징적 피난처로서의 궁을촌(弓乙村)에 대한 ‘行乞而入’은 재물을 버리고 가난을 쫓는다는 의미보다도 최고의 원리를 터득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는 설명도 있다.

어쨌든 이상과 같은 삼절운수설은 극한 상황에 처하여 사적인 안심입명과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예조신앙(豫兆信仰)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정감록신앙의 소극적인 국면인 점에서 십승지지신앙(十勝之地信仰)과 마찬가지라고 보겠다.

계룡산천도설에서는 이씨조선이 망하고 정씨왕조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한다는 미래국토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어서 보다 적극성 있는 반왕조의 역성혁명을 주술적 예조신앙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오악(五嶽)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명산으로 일컬어져 왔고 풍수지리상으로 산세가 신묘하다 하여 도읍에 적합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즉, 지리산을 출발하여 산맥이 거꾸로 북상하다가 다시 계룡산에서 남하하는 형세는 원시반복(原始反復)하는 회룡고조(回龍顧祖)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산태극(山太極)을 이루고, 또 계룡산 신도안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북상하여 금강과 합류하며 이 금강의 다시 계룡산을 돌아 서남방으로 흐르는 형세가 수태극(水太極)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주의 중심인 태극이 저절로 구현되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이재궁궁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궁을촌의 신천지가 기대된다는 것이다.

계룡산도읍설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어 왔으며, 조선 창업 당시의 초석유적(礎石遺蹟)이 남아 있는 사실이라든지 ‘신도안[新都內]’·‘사대문(四大門)’ 등이 있다. 한양에 도읍한 이씨왕조 다음에 계룡산에 등장하는 정씨왕조는 그 뒤를 잇는 가야산의 조씨왕조(趙氏王朝)와 또 그 뒤를 이을 완산(完山)의 범씨왕조(范氏王朝)가 등장하기 전에 800년 동안 계룡산에서 기업을 닦을 것이라고 하였다.

계룡산과 성리학적 우주론에 근거한 우주의 중심으로서 태극과의 관련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발상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하거니와, 그러면서도 인간 정신의 지평에 잠재하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종교적 상징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다. 어쨌든 계룡산천도설은 분명히 역성혁명론이 뒷받침하는 것으로 부득불 인격적 존재로서의 진인의 출현을 빌려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결구이다.

진인출현설은 정감록신앙의 핵심인 동시에 귀결이라고 보겠으며, 서구 종교의 표현을 빌리면 일종의 메시아니즘(Messianism)이라고 보겠다. 즉, 말세가 쇠진한 뒤에는 정도령, 즉 구세주가 나타나 세계를 구원하고 복락이 약속된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는 것이다. 다만, 진인의 인격적 특질이 어떠하다는 구체적 상황이 설정되지 않은 익명성이 두드러짐으로써 조선 후기의 정감록신앙과 결부된 민중운동은 종교적 성격이 매우 애매모호하다.

따라서 운동의 정향(定向)이 주술적 신비성을 띠며 이념적 지표의 불확정성이 엿보인다. 만일 <감결>에서 미래에 출현할 진인의 인격적 특질을 구체화했더라면 그것의 주술적 동기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은 그러한 인격을 중심으로 뚜렷한 이념적 지표나 표상을 설정했을 것이다.

정감록신앙에 관련된 무리들이 대체로 반왕조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신앙의 내용으로 보아 충분한 개연성을 지닌다. 문자 해독이 어려웠던 조선시대에 천문·역수에 통효(通曉:찬히 깨달아서 앎)하고 역(易)이나 복점·오행 및 풍수에 대한 지식을 능란하게 구사하여 파자풀이나 참요를 만들어 낼 만한 능력이 있는 계층은 상당한 지식층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른바 반왕조적 원국실지(怨國失志)의 무리들은 대체로 양반이거나 지식 계층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감록신앙이 만연하는 왜란·호란 양란 이후부터 18세기 전반까지는 적어도 이들 원국실지의 무리들이 도당적 결집을 이루어 집권 세력에 대항했으며, 여기에는 정감록신앙이 결부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는 당쟁의 극성기에 해당하며, 끊임없는 정치적 경쟁과 갈등에 따른 숙청과 보복의 연속이었고, 따라서 여러 차례에 걸친 반정(反正) 내지 그 음모가 발각되었다. 1628년에 ‘초포조입계룡건도(草浦潮入鷄龍建都)’라는 은어와 관련된 정감록신앙을 가탁한 유효립(柳孝立)·윤계륜(尹繼倫)의 모반사건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는 것이며, 참위설이나 비기를 매우 좋아해서 그 때문에 희생당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의 행적도 마찬가지이다.

또 실학자인 유수원(柳壽垣)이 연루된 남변사건(南變事件)이나, 1768년(영조 44)의 비기에 의한 변란도 유랑 지식인이 주동되었다는 점에서 지식인과 그들의 반왕조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8세기 이전까지는 정감록신앙을 가탁한 민중운동은 반왕조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물론이지만, 대체로 집권 세력에 불만을 품은 잔반층(殘班層) 지식인의 소집단적인 결집이었다고 보겠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는 그 양상이 상당히 달라진다. 영조가 집권한 뒤 탕평책의 실시와 노론 일당전제가 지속되면서 집권 세력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반정이나 정변에 의한 극한 대립의 정치 과정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대신 민중 세력의 점진적인 성장이 왕조의 존망을 위협할 수 있는 중대한 시점에 이르게 된다. 정조가 척참윤음(斥讖綸音)을 쓰게 된 사정도 정감록신앙을 가탁한 민중운동의 전조(前兆)를 걱정한 사례로 판단된다.

홍경래의 난에 이르러서는 소수 지식층의 신앙이 아닌 정감록신앙의 민중적 발상을 엿볼 수 있다. 순조 때 자주 일어나는 민란은 홍경래의 난 이외에도 대부분이 정감록신앙을 가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의 말기적 증세와 주술적 민중운동의 광범위한 확산을 간파하게 된다. 더구나 삼정의 문란과 이도(吏道)의 타락상을 가져온 세도정치는 정감록신앙이나 <감결>의 주술적 원망(願望)이 맹렬한 기세로 민중의 마음에 자리잡게 하였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터지는 민란이나 심지어 생활난으로 화적떼로 둔갑한 무리들도 <감결>에서 빌려 온 참설을 유포하는가 하면 이재궁궁을 되뇌는 형편이었고, 그 수괴는 스스로가 진인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1862년(철종 13)의 임술민란이 정감록신앙을 가탁한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 밖에도 정감록신앙의 중요한 요소는 동학의 교리에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학에 이어 일어난 한말 신종교에 그대로 이입되었다. 동학에서 비롯한 후천개벽설이나 혁세주의는 그대로 증산교에 전수된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정감록≫을 믿는 반일적인 색채를 띤 비밀결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복 후 6·25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감록신앙이 사회혼란기마다 유행하는 현실을 볼 때, 정감록신앙이 민중의 마음속에 뿌리 깊이 자리잡고 전승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이능화, 『조선기독교』, 창문사, 1928)
『조선상식문답』(최남선, 동명사, 1946)
『정감록(鄭鑑錄)에 대한 사회학적고찰』(최수정, 해방서림, 1948)
『원본정감록(原本鄭鑑錄)』(김산수, 명문당, 1972)
『정감록집성(鄭鑑錄集成)』(안춘근편, 아세아문화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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