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원 ()

법제·행정
인물
일제강점기 충남도지사, 중추원 참의,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카라쓰카와 쿄우겐[烏川僑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7년(고종 24) 4월 24일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연일(延日)
출생지
경상도 대구
정의
일제강점기 충남도지사, 중추원 참의,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창씨명은 카라쓰카와 쿄우겐[烏川僑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7년 4월 24일 경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1892년부터 1903년까지 대구 성산사숙에서 수학(修學)하였다. 1906년 4월 탁지부 주사가 되었다가 그만두고 9월 일본에 유학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과 교외생으로 1년간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1908년 1월 재무감독국 주사가 되었고, 1910년 3월부터 임시토지조사국 서기로 1916년 5월까지 근무하였다. 그 사이에 1912년 8월과 1915년 11월에 각각 한국병합기념장과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수가 되었고, 1920년 2월부터 경상남도 이사관으로 재직하였다. 1924년 10월 훈6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다. 1925년 1월 경상남도 시학관을 거쳐 9월부터 조선총독부 중추원으로 옮겨 통역관 겸 서기관에 임명되었고, 조선사편수회 산사를 맡았다. 1927년 9월과 이듬해 9월 조선총독부 주최 지방행정강습회 강사로 활동하였고, 1928년 11월 쇼와[昭和]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2월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에 위촉되었고, 9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1월 전라북도 참여관에 임명되었다. 1930년 4월 전라남도로 옮겨 산업부장을 맡았다. 1932년 11월 전라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3년 4월 황해도 지사로 승진하여 6월 훈4등 서보장을 받았고, 10월 조선신궁봉찬회의 발기인·고문·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10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고, 이듬해 3월 고등관 1등으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5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고, 6월 종4위에 서위(敍位)되었다. 종4위에 서위되는 것은, 남작 작위를 가진 ‘조선귀족’에 준하는예우를 받는 위치가 됨을 의미한다. 1937년 2월 충청남도 지사로 옮겼다. 같은 해 8월 ‘애국기’ 헌납 기성회를 조직하여 1년 후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 각각 1대씩 헌납하였다.

1939년 5월 충청남도 지사에서 물러나면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가 되었고,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또 같은 달 ‘특지에 의해 위(位) 1급 피진(被進)’ 조치로 정4위에 승서(陞敍)되었다. 7월 배영동지회 상담역을 맡았고, 9월 중앙협화회 협화사업관계 간친회에 참석하고, 총독부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조선(朝鮮)』 1939년 10월호에 「내선일체의 윤리적 의의」라는 글을 기고하여 게재하였다. 1940년 2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전무이사로서 남부지역 각 군을 시찰하였고, 4월 욱일 중수장(旭日中綬章)을 받았다.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총무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하면서 『춘추』, 『삼천리』, 『조선』, 『조광』, 『반도의광』 등의 잡지에 글을 기고하여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고, ‘내선일체’를 주장하였으며, 전시총동원체제의 필요성과 의의를 선전·선동하였다.

1941년 6월 『제22회 중추원 참의 회의 답신서』를 통해 ‘시정상 가일층 성전(聖戰)의 진의를 천명하여 반도 민중으로 하여금 황국신민으로서의 신념을 굳히고 각오를 새롭게 할 방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였다.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 및 상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준비위원을 맡았다. 9월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 유격대의 경성역대 대원으로 채권 판매 활동을 하였고, 10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가 되었으며, 11월 지원병 보급 설전대의 일원으로 지원병의 취지를 선전하였다. 1942년 중추원 참의로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여 식량 공출을 독려하였다.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0년 4월 29일자로 욱일중수장을 받았고, 같은 달 일제의 ‘거물 군수’ 정책의 일한으로 경기도 고양군수에 임명되었다. 1945년 1월 대화동맹 발기인 및 준비위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충청북도 지사에 다시 취임하였다.

광복 후 반민특위가 설치되었을 때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반민족행위처벌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반민특위 활동 위축 과정에서 8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1950년 8월 납북되었으며, 그 이후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5(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집필자
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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