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극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법부대신, 학부대신, 궁내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만송당(晩松堂)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4년(고종 1) 11월 6일
사망 연도
1927년 6월 1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서울
정의
대한제국기 법부대신, 학부대신, 궁내부대신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지낸 이연응(李沇應)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64년 11월 6일 출생하였다. 1879년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1893년 유학(幼學)으로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895년 비서감 우비서랑(秘書監右秘書郎)·왕태자궁 우시독관(王太子宮右侍讀官) 등을 역임하였고, 1896년 규장원 교서(奎章院敎書)·경연원 시독(經筵院侍讀)·장례원 장례(章禮院章禮) 등을 지냈다. 1897년 규장각 직각과 비서원승이 되어 원구고제(圜丘告祭) 시에는 선표관 장례(宣表官章禮)를 맡았고, 이듬해 흥선대원군 상례 때 지문 서사관(誌文書寫官)을 담당하였다. 중추원 의관·시강원 부첨사(侍講院副詹事)·규장각 직학사(奎章閣直學士) 등을 거쳐 칙임관 4등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가, 홍릉 제조(洪陵提調)·경효전 제조(景孝殿提調)·시강원 첨사·종정원경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경효전 전작례(奠酌禮)에서 예모관(禮貌官)으로 참여하여 가자되었고, 내부 협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서리 내부대신 사무(署理內部大臣事務)를 맡았다가,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시강원첨사를 겸임하였다. 1900년 경기도 관찰사, 이듬해 궁내부 특진관을 거친 뒤 비서원경을 지냈다. 1902년 의정부 찬정에 올랐고, 궁내부 특진관·비서원경·장례원경·태의원경·시종원경·홍문관 학사 등을 거쳐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 개전 후 학부대신이 되었다가 일본시찰 학문상 제도 급 사무로서 시찰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일본 천황으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05년 귀국 후 훈2등 태극장을 받았고, 궁내부 대신이 되어 훈1등 팔괘장을 받았다.

1907년 7월 궁내부 대신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주로 교육·경제활동과 한일합병 청원을 위한 정치·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1월 13일 통감부의 식민정책에 동조하며 조선인을 교화시키기 위해 전국의 보부상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동아개진교육회 임시회에서 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한국의 정치인과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1907년 10월 조직된 신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일본황태자 도한 환영 위원으로 활동하여 1909년 일본 정부로부터 황태자 도한기념장을 받았다. 1909년 9월과 10월에 각각 신궁경의회와 신궁봉경회의 부총재가 되었는데, 이들 단체는 단군과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봉안하는 신궁을 건립하여 일본과 한국을 각각 주종관계로 하는 ‘일선동조론’을 구현하려던 단체였다.

1910년 이완용·민영규·이하영 등과 함께 일진회 중심의 한일합병 청원을 반대하면서 자신들이 합병청원을 주도하기 위해 조직한 정우회와 국민대연설회에 각각 부총재와 부회장으로 참여하였다. ‘한일합병’ 직전까지 대한상업주식회사·작잠주식회사·종묘주식회사·대륙어업회사 등의 회사 설립과 중개조합소·농무조합소 등의 경제단체에 관여하여 상업·농업·조림업·잠업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합병에 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10월 7일 발표된 남작 작위 수여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그에 따라 1911년 1월 13일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고, 같은 해 2월 22일 총독관저에서 열린 작기 본서 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참석하였다. 1911년 8월 29일자 『매일신보』에 ‘한일합병’ 1주년을 맞아 일제의 조선지배를 찬양하는 “큰 바다는 측량키 어렵고 태산은 찰나가 아니니 / 서로가 뒤섞여 비로소 하나가 되어 두 마음이 사라지는구나”라는 축사를 게재하였다. 이어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12월 정5위에 서위되었다.

1910년 10월부터 약 한 달여 기간 동안 ‘천장절’에 맞춰 조직된 조선귀족 일본관광단에 참가하여 일본에 건너가 천장절 행사에 참가하고 일본 각지 및 산업 등을 관람하고 귀국하였다. 1911년 일제의 삼림령 제정 이후 전국의 임야 및 삼림을 일본인에게 헐값 내지 무상으로 대부, 불하할 때 임야 및 삼림을 취득하고 재산증식을 위해 조선귀족들과 자산가들이 조직하였던 귀족 보식원 조합(貴族普植園組合)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15년 일제당국이 식민통치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하였던 ‘시정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경성협찬회에 50원의 금액을 출연, 특별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조선무역주식회사 발기인, 경성제사주식회사 취체역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0월 20일 제2대 이왕직 장관으로 임명되어 1923년 3월 1일까지 재임하였다. 1920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의 동상 건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2년 조선인과 일본인 유력자·자산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친일 사교 단체인 조선구락부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내선융화를 찬동·선전하고 일제 식민지배에 적극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동민회에 가담하였다. 1924년 4월부터 1926년 10월까지 부회장, 1926년 11월부터 1927년 6월 1일 사망 시까지 회장 및 재단법인 동민회 이사장을 역임하면서 기관지 『동민』에 수차례에 걸쳐 내선융화 및 일제 식민지배를 옹호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또한 내선융화, 관민교정, 식산흥업 등을 목표로 결성된 대정친목회에 참여하여 1925년 3월부터 사망 시까지 이사와 회장을 역임하였다. 일본 정부는 사망 이틀 후인 1927년 6월 3일 이재극에게 정4위를 추서하였다. 그의 남작 작위는 1927년 9월 1일 장남인 이인용이 세습하였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 2009)
『조선귀족약력』(『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Ⅳ,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8)
집필자
최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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