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용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도이, 道以
기호, 耆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9년(영조 25)
사망 연도
1805년(순조 5)
본관
동래(東萊)
주요 관직
이조판서|전라도관찰사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도이(道以). 호는 기호(耆湖). 정석조(鄭錫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신검(鄭愼儉)이고, 아버지는 정동윤(鄭東尹)이며, 어머니는 조인명(趙麟命)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으로 입사하여 형조정랑으로 재직중 1785년(정조 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규장각직각이 되었다.

1787년 영남좌도어사로 다녀와 진제(賑濟)를 게을리하거나 군정(軍政)·무염(貿塩)의 비위가 있는 양산군수 이진응(李進膺), 밀양부사 심진(沈鉁), 비안현감 남인구(南麟耉), 청도군수 정창기(鄭昌期), 칠곡부사 송익휴(宋益休), 군위현감 임희유(任希遊) 등의 파직을 진언하였다.

이듬해 함경도에 흉년이 들자 북관위유어사(北關慰諭御史)로 파견되어 기민진제(飢民賑濟)를 위하여 남관곡(南關穀) 2만석을 속히 옮겨줄 것과, 기민구휼(飢民救恤)에 공이 많은 명천부사 정우붕(鄭宇朋), 북청부사 유지양(柳知養) 등에게 포상할 것을 진언하였다.

1789년 감진어사(監賑御史)가 되어 진곡(賑穀)을 늘려줄 것을 상소하였으며, 이어 승지가 되었다. 1791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환곡의 폐해를 시정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3년 이조참의가 되었으며,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규장각직제학이 되어 약원부제조(藥院副提調)를 겸하였다.

1799년에는 예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1801년(순조 1) 고부 겸 청시청승습부사(告訃兼請諡請承襲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수원부유수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1804년 검교직제학(檢校直提學)에 이어 한성부판윤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다가 임소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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